이건 꿈이다. 첼은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안구를 덮는 감각이 생경했다. 손안에 쥔 스태프의 촉감이 비현실적이었다. 잠을 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 기억도 희미했지만, 아마 꿈을 꾼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몽롱한……. 이따금 천천히 목숨을 잃을 때 서서히 멀어지던 의식과도 같은 그런. 첼은 저도 모르게 두 팔에 무게를 실었다. 오래 산 나무를 깎아 만든 스태프는 그에 걸맞게 오랜 시간동안 손을 타 맨질맨질했다. 멍하니 힘을 가하던 첼은, 그 때문에 손안에서 스태프를 미끄러뜨렸다. 세상이 뒤집혔다. 첼은 생각했다. 이건 꿈이다.
서서히 의식이 또렷해졌다. 첼은 등의 아픔을, 미묘한 눈부심을 자각하며 손목의 고통도 서서히 자각했다. 첼의 장갑은 손목도 채 덮지 않는 짧은 것인데다 한 짝뿐이었다. 맨 살을 내리누르는 톨비쉬의 큰 손에는 가죽과 금속판을 엮어 만든 건틀렛이 덧씌워져 있었다. 첼은 그가 온 힘을 다해 저를 내리누르고 있는 걸 알았다. 크게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어깨와 붉은 눈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 배 위에 올라탄 그의 무게가 현실감을 갖추자 숨쉬기가 무척 버거워졌다.
“……무거워.”
오랜 지체 끝에 톨비쉬는 서서히 첼의 두 손목을 놓았다. 그의 배 위에서 몸을 내릴 때에는 짐짝을 내던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털퍽. 첼은 머리 양 옆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제 두 팔 너머로 그 소리를 들었다. 뒤이은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아, 망했군. 그는 밀려드는 낭패감에 가벼운 헛소리를 덧씌워 감췄다.
“당신도 우는구나?”
“그야, 목을 졸렸으니까요. 생리적인 현상……, 아니. 저도 눈물이라는 게 있긴 합니다만, 첼 씨. 설마 그게 궁금해서 절 죽이려 드신 건 아닐 텐데요?”
물론 아니지. 어쩌다 한 번쯤 벌어질 법한 사고였다. 어쩌면 실수, 혹은 자연재해. 제 안에 깃든 힘을 생각하면 자연재해라 생각하는 편이 톨비쉬로서도 납득하기에 편할 것이다. 첼은 하필 이럴 때 손안에 없는 제 정령을 향해 진심도 아닌 짜증을 던졌다. 날아간 방향은 허공이다. 첼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짧은 시간이나마 붙들렸던 손목이 무척 쓰라렸다. 미안, 하고 운을 떼며 모자를 찾아 먼지를 털었다. 챙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 눈을 감추며 제 혼돈도 감췄다. 어쩌다 그의 목을 조르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보나마나 과거의 그림자에 먹힌 탓이겠지. 누구의 그림자인지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톨비쉬는 눈썹에 손날을 세워 차양을 만들었다. 그 아래 그늘 속에서 파란 눈이 하늘을 가늠한다. 정점을 찍은 해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숲속에서의 낮은 앗 하는 사이에 끝나버리는 것이라 이미 빠져나가기를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슬슬 물러나야겠네만, 아벨린. 어떤가?”
얼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톨비쉬의 시선을 받은 여기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더 허공을 쏘아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돌아보던 두 눈이 한 순간 흔들리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크흠,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애매하네요. 뭔가 덧씌운 것도 같은데 어디부터 벗겨내야 할지 모르겠군요. 좀 더 봐야겠어요.”
아벨린의 두 눈은 탐지를 계속해보려는 것처럼 여전히 허공을 헤집고 있었으나 평소보다 날카로움이 덜했다. 사실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스스로도 알아 다잡으려 무척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제 부족으로 임무에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그에게 제 혼란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상충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음……. 곧 해가 질 걸세. 그리고 이 이상 관찰을 계속하면 오히려 저쪽에서 알아챌 우려도 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났으면 하네만.”
아벨린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납득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 안심했다. 갖가지 심경이 뒤섞여 머리가 아파왔다. 심적인 문제도, 눈앞의 임무도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행동은 빨라야 했다. 어찌됐던 오래 지체할 문제는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최대한 기척을 죽이기 위해 평소 챙겨 입던 갑옷 차림이 아니었다. 흔적을 지운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엔 발자국도, 발소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적당한 크기의 모닥불이 타닥거렸다. 능숙한 솜씨로 피워놓은 불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오랫동안 잘 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한참 전에 해가 진 하늘은 검푸른 빛이었다. 아벨린은 그 속에서 빛나는 별자리 몇 개를 알아보았다. 옆에서 김 오르는 컵이 건네어졌다.
“피곤한가?”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 일이야 아발론 게이트에서 수행하고 있는 임무의 반도 안 되니까요.”
“그만한 일을 자네에게만 일임하고 있어 미안하군. 밖에 나온 김에 좀 쉬어두게. 숨은 돌려야지 않겠나.”
“톨비쉬.”
아벨린은 단호하게 톨비쉬를 쏘아보았다. 그는 했던 말을 반복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제 몫의 데운 물을 홀짝였다. 아벨린은 한숨을 삼키며 그를 따라 컵에 입술을 댔다. 천천히 한 모금 삼키자 차가운 밤기운이 뱃속에서부터 물러난다. 아벨린은 그 감각에 주의를 집중했다. 심부에서 말단으로, 손끝으로 퍼지는 온기는 요 며칠 사이 자각한 수런거림과 닮아있었다.
뱃속이 잠잠해지자, 아벨린은 눈동자만 굴려 옆에 앉은 자를 흘끗 살폈다. 캠프파이어의 조명을 정면으로 받는 단정한 얼굴은 약간 불만스러운 점은 있을지언정 믿음직스러웠다. 생김새의 문제가 아니라 아벨린이 그에 대해 갖고 있던 감상이었다. 기사단 제일의 기사, 신성 스킬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신성력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결사단으로서 같은 임무를 수행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그녀 머릿속을 스치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그 모두가 하얗게 의미를 잃었다.
아벨린은 또다시 심부에서 시작되는 수런거림을 자각했다. 요 며칠 사이의 일이었다.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의 당혹이었으나 괜한 움직임을 보였다간 제 혼란을 들킬 것 같아 애써 가만히 있었다. 뜨거운 물을 식히는 척 몇 번이나 컵 속으로 숨을 불어넣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정하려 애쓰며, 아벨린은 그와 단 둘이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원망했다.
전투조의 조장끼리는 전서구나 그보다 더 비밀스러운 수단을 통해서 상호간의 보고를 주고받곤 했다. 아발론 게이트에 발이 묶여 밖 상황을 잘 알 수 없는 아벨린에게는 그 보고서 몇 통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수행하고 있는 임무-게이트의 감시-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고 그녀 본인이 그 임무에 적임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전투조의 조장으로서 상시 대기와도 같은 상황에 처하자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에 늘 숨이 막혔다.
그러다 더 견딜 수 없어질 때마다 읽던 것이 톨비쉬의 보고서였다. 피네의 것은 평범한 수준이었고 카즈윈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약식이었다. 톨비쉬의 보고서를 외우다시피 반복해서 읽고, 읽고, 또 읽다가 어느 날 깨달은 그의 배려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보고서에는 필요한 사항 외에도 그녀가 궁금해 할만한 내용이 수두룩하게 적혀 있었다. 제 처지를 답답하게 여기는 심정을 그가 꿰뚫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러워졌다. 정갈한 기사라면 흔들림 없이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이후 스스로를 다잡을 때마다 톨비쉬의 편지가 떠오르곤 했다. 아벨린은 어렴풋이 제 안에서 무언가 변한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왔다. 선지자들이 아발론 안에 갇힌 이래, 그들을 추종하던 세력의 잔당은 대륙 각지로 숨어들었다. 톨비쉬는 그 중 꽤 큰 무리의 흔적을 찾은 것 같다고, 그러나 엘베드 조, 자신의 능력으로는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며 그녀의 협력을 요청했다. 아벨린은 아발론 게이트의 임무를 내버려둘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요청을 거절하는 게 이전의 자신다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자 그는 밀레시안을 내세웠다. 아주 잠깐이라면 그가 그녀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우지는 못하더라도 돌발 상황에는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거라는 설득에는 그녀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벨린은 그가 제시한 그 모든 타당한 근거와 필요성, 합리성과 예의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더 지체한 후에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찜찜할 이유는 하나였다. 아벨린과 함께 행동하는 인원은 톨비쉬 하나였다.
받아든 물의 절반이 사라졌다. 아벨린은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몸에 두른 모포를 여몄다. 계속되는 혼란에 익숙해지기는커녕 오늘은 결국 임무에 지장까지 초래했다. 두고두고 후회스러울 것이다.
“최대한 조용히, 빠르게라고 했죠. 이래서는 우리 둘만 따로 행동하는 의미가 있나 모르겠군요.”
아벨린은 저도 모르게 약한 소리를 흘리고는 뒤늦게 흠칫 놀랐다. 사명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 조원의 목숨까지 책임져야 할 조장의 책무를 진 자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수치심보다도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던 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그 원인이 타인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이 무척 억울했다. 그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톨비쉬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조급할 건 없지 않나, 아벨린. 진전이 있었으니 내일도 뭔가 알아낼 수 있겠지. 서두를 건 없네. 차근차근 해나가면 되는 일이지.”
“……자리를 오래 비우고 싶지 않아요. 알터도 걱정되고요.”
“밀레시안 씨도 계시니 마음 가볍게 먹게. 그래서야 될 일도 안 될 거야. 당장 아침부터 탐색을 재개해야 할 텐데, 그렇게 수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제대로 잠은 잘 수 있겠나.”
틀린 말이 아니라 더 약이 올랐다. 아벨린은 치밀어 오른 화를 꾹 눌러 삼키고 컵을 내려놓았다. 대꾸할 말이 없었으나 억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제 혼란, 스트레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그였는데도 저 태연자약한 대꾸가 너무나 얄미웠다. 아벨린은 자신답지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쏘아보았다. 최근 그를 생각했을 때, 그리고 요 며칠 사이 그를 대할 때 자기 자신처럼 행동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봐주는군.”
그 한 마디에 얼어있자 그는 싱긋 웃더니 아벨린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의 얼굴에 정면으로 쏟아지던 모닥불의 빛이 이제 그의 얼굴 반쪽에 그림자를 어룽거리고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 뭔가 실례를 범한 게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주게. 사과할 일이라면 사과할 테고 해명할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네. 아니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나? 나라도 괜찮다면 들어주겠네, 아벨린.”
그래,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정석적인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그가 무척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벨린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답게 행동하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상대가 톨비쉬여서야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예민하게 눈치 챘을 사람이니까. 그가 제 혼란의 원인까지는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니, 정말 모를까? 아벨린은 씁쓸한 기분으로 반쯤 거짓말을 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내 문제죠.”
“그건 일단 다행이로군. 그렇다 해도 무슨 일인지 들려줬으면 하네. 가능하다면 도움도 주고 싶어. 임무를 수행하는 내내 수심이 깊어보였네. 알터에게는 말하지 못할 문제라 그런 게 아니었나? 이따금 나를 흘끔거리기에 말해주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네만.”
아벨린은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태연하게, 들켰다는 사실조차 모르도록 그렇게 태연하게 자신과 행동을 같이 했다니. 창피스러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어지는 말이 없어 더 당황스러웠다. 불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아벨린은 다시 톨비쉬를 보았다. 그는 내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자네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 옆에서 보기에 서글퍼질 정도로 말이지.”
그는 멀쩡한 얼굴로 서글프다는 말을 참 잘도 입에 올렸다. 그가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혹하는 이유는 아마 캠프파이어가 드리운 그림자 탓일 것이다. 그의 얼굴에 진 그늘. 서글픈 심정이 뭔지 당신도 알아요? 저도 모르게 질문을 삼킨 아벨린은 가볍게 이를 앙다물었다. 톨비쉬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그의 어깨가 알고 있던 것보다 작아보였다.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가? 고민조차 털어놓지 못할 만큼.”
미덥지 못한 톨비쉬. 아벨린은 작게 웃어버렸다. 그 누구라도 웃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기사로 평가 받으며 기사단의 오랜 전통 몇 가지까지 바꿔놓은 사람이 저런 말을 입에 담았다고 하면 그 누가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미덥지 못한 건 그가 아니라 그녀다.
“……나는 주신의 기사로 살아왔어요. 신께 나를 바친 후로, 나는 그 분의 뜻에만 따르면 되었죠. 쓸데없는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건, 나와는 연이 없는 줄 알았어요.”
아벨린은 쥐고 있던 컵 손잡이를 살살 매만졌다. 순순히 말할 마음이 든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쯤은 흘려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어떤 감상인지, 혹은 누구를, 무엇을 향한 감상인지는 더 물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상 말해버리면, 상대가 톨비쉬이기 때문에 들킨다. 아벨린은 아직 제 감정이 무엇인지도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 번도…… 이런 감상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임무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니까요. 그 뿐인 얘기에요. ……걱정해야 할 만한 일인가요?”
마지막 물음은 진심에서 우러났다. 걱정해야 할 일이라면 끊어낼 것이다. 아튼 시미니의 기사로밖에 살지 못한 그녀는 앞으로의 삶도 주신 앞에 헌납했다. 신의 기사로서 걸을 길 외에는 아무것에도 시선 두지 않으리라 결심한 날이 있었다. 그 길에 박힌 돌덩이라면 빼내어 치워야 했다. 그녀의 완고함은 좋은 곡괭이였다.
상기된 목소리가 그녀의 손을 비워냈다.
“전에도 말했던 적이 있는 것 같네만, 바로 그걸세, 아벨린.”
마음의 준비가 허사가 되었다. 아벨린은 불을 보던 얼굴을 돌려 도로 그를 보았다. 톨비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것과 꼭 같은 미소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돌아보길 기다렸던 듯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인간일세. 주신께서 내리신 사명을 수행하고 있지만 본 바탕은 인간이지. 쓸데없는 생각이나 감정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네에겐 긍정적이기까지 한 일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네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스럽고……. 기쁘네.”
이런 문제는 확실히 알터에게 말하기 어려웠겠다며 그는 손을 뻗어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아벨린은 그가 따라주는 대로 컵에 물을 받으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당연한 일이다. 긍정적인 일이다.
기쁜 일이라고 했다. 손 안에 온기가 돌아왔다.
“스스로를 너무 졸라매지 않아도 되네, 아벨린. 우리는 방황하는 인간이야. 그렇기에 주신께 귀의한 게 아닌가.”
당신도 방황하나요? 빈손에 새로운 질문이 쥐였다. 꼭 쥔 손에 갇혀 그녀 안에 남았다.
“저 곳이에요. 느껴져요?”
“음……. 확실히, 정확히 짚어주니 알겠군. 고맙네, 아벨린.”
아벨린이 가리킨 곳은 절벽 아래, 잡목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입구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잡목을 주위에 심고 그 위에 또다시 신성력 따위로 눈속임을 가한 동굴인 듯 했다. 날이 밝자마자 탐색을 재개하여, 오래 걸리지 않고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둘 다 말은 않았지만 어젯밤의 대화 이후 그녀의 마음도, 톨비쉬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아벨린은 후드를 뒤집어썼다. 질문을 삼키느라 미처 하지 못한 감사 인사가 마음에 걸렸지만 하지 않아도 될 성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굴었다.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이군. 미안하지만 혼자 복귀해주겠나? 나는 조원들을 기다려 곧바로 다음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
“애초에 그런 임무 아니었나요. 당신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죠. 괜찮습니다.”
아벨린은 옷을 여미느라 톨비쉬가 말을 삼키며 입을 꾹 다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단칼에 잘라내듯 말한 것처럼 절도 있게 그를 향해 돌아섰다. 애써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대낮에 그를 똑바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정리된 건 아직 아니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게.”
“당신도요, 톨비쉬.”
그것으로 끝이었다. 톨비쉬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아벨린은 걸음을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본래 임무로 복귀하고 싶었다. 수런거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니 알터에게도 좀 더 신경써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벨린은 한참 움직인 후에 멈춰 섰다. 숲의 출구가 눈앞이었다. 어쩐지 나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아벨린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젯밤의 당신이라면 이 질문에도 대답해줬을까요? 아니면, 어제 삼킨 무수한 질문들처럼 나는 이것 또한 묻지 못했을까요, 톨비쉬?
오래된 종이의 냄새는 먼지가 풍기는 것과 닮아 있다. 책이 나이를 먹어 부스러져 될 것이 먼지뿐이니 어쩌면 책과 먼지는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이 덥힌 공기 중으로 텁텁한 향이 떠다녔다. 그는 그 냄새 못지않게 텁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나인. 부탁이 있어.”
고지식한 그 남자는 말을 잇기 전에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분위기만큼이나 무거운 표정과 시선이 무척 곧았다. 곧은 데다 무거운 건 부서지기도 쉬운 법이라,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만으로도 손쉽게 금이 갔다. 나는 그가 내 대답에 당황할 것을 알았다.
“차 마시자.”
“뭐…….”
“좋은 과자가 생겼어. 다과회야. 어때?”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는 곧 당황을 가라앉혔다. 단칼에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각오 정도는 하고 왔을 것이다. 교섭 내지는 설득의 여지가 주어지자 그는 빠르게 침착해졌다. 그래, 운을 떼더니 그의 표정 어딘가가 무너져 내렸다. 균형이 무너진 얼굴에서 조금씩 무언가 새어나오려 했기에, 나는 몸을 돌려 과자를 꺼내러 갔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티파티, 다과회에 으레 기대하기 마련인 부드러운 분위기는 없었다. 그와 나, 마주앉은 인원이 우리 둘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고 오랜 반목이 있었다. 믿음이 있었고 배신 또한 있었으며 말로 다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우리 사이에는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저마다의 무게를 지닌 탓에 그는 짓눌린 입을 쉽게 열지 못했다. 나는 좀 더 기다릴까 하다가 마음을 고쳤다. 종종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가 있었다. 방해받느니 일찍 끝낼 것이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뭐야?”
나는 그의 용건을 짐작하면서도 물었고, 그 또한 내가 제 속내를 짐작했다는 걸 알 것이다. 때문에 그는 무척 침착하려 애썼다.
“학생회장을 맡아줘. 너밖에 없다, 오나인.”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을 지체했다.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러나 그의 용건을 짐작한 그 순간 이미 결론은 내려져 있었다. 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아무 맛도 없는, 뜨겁기만 한 맹물이었다.
“거절하겠어.”
“오나인.”
“차 다 마셨지? 돌아가.”
아직 채 김이 다 식지 않은 찻물과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과자. 이렇게 금세 쫓아낼 거면 왜 자리를 권한 거냐고 물을 법도 하건만 그는 입을 다문 채였다. 알고 있다. 그 자리에는 내가 최선이라는 것을, 아니 나 외에는 그 누구도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나를 설득할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인아.”
한 순간 멈칫 몸이 굳는 것까지 내 마음대로 자제할 수는 없었다. 이미 뒤돌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미 해가 바뀌어 과거에 지나지 않는 일, 과거일 뿐인 감정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나는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돌아가.”
세 호흡이 지나고,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지난 후에,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공기를 깼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다. 무거운 발소리가 느리게 입구를 향했다. 달칵, 조금 긴 망설임. 걸어 나가는 발소리와 뒤이은 문 닫히는 소리가 무척 오랫동안 건물을 울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았다. 찻잔 두 개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한풀 꺾여 있었다.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과자접시, 반도 비워지지 않은 찻잔, 그리고 내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차향 사이로 먼지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한다. 낡은 책은 먼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