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문이 무척 무거워보였다. 아니, 무거운 건 제 마음이다. 피네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손을 들었다. 똑똑, 두드렸으나 대답은 없었다.

 

카즈윈.”

 

역시 대답은 없었다. 피네는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카즈윈, 나야. 들어갈게.”

 

잠시 기다렸으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카즈윈은 거절하고 싶었다면 직접 문을 열어 문간에서 용건을 처리할 사람이었으므로, 피네는 문고리를 잡아 천천히 돌렸다. 문 너머엔 4인용 테이블 하나로 꽉 들어차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카즈윈은 그 중 하나에 앉아 등을 보이고 있었다. 피네는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은 후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잡은 채로 문에 기댔다.

 

카즈윈.”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나른한 표정이 반쪽짜리 얼굴로 그녀를 향했다. 피네는 천천히 걸어 그의 오른편 의자를 잡았다. 그는 피네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피네는 그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좀 심각한가봐.”

그렇던데.”

……그렇던데, 하고 끝날 일이 아니잖아. 징계라도 받으면 어쩔 생각이야?”

 

톨비쉬가 늦는 이유는 본부에 들러 단장의 전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거진 결정된 사항이었으니 큰일은 없겠지만 이토록 태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었다. 그는 이유 없이 행동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번의 지나친 행동에도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피네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잘 보내줬어?”

……글쎄.”

또 그렇게 말한다. 오는 길에 다른 조원은 어쩌고 있나 보고 왔어. 괜찮더라. 이번에 임무를 다 한 그 아이도 편히 갔겠지.”

 

그는 답하지 않았으나 피네는 그가 맞잡아준 손이 대답이라고 느꼈다. 제 유해가 흔적조차 남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을까. 눈감기 전에 오래 아팠을까. 그 날 제 삶이, 오랫동안 걸어온 사명의 길이 끝날 줄은 알았을까. 편히, 갔을까.

 

피네는 그 중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카즈윈이 사명을 다한 자의 마지막에 소홀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오직 그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늦는군.”

그러게. 곧 오시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이 놓여났다. , 피네가 대답하자 적당한 지체 후에 문이 열렸다. 톨비쉬는 변함없는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피네는 종종 카즈윈과 톨비쉬가 무척 닮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건강해보여 다행이군요.”

 

그는 방 가장 안쪽으로 걸어 카즈윈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아벨린은 침착하려 애쓰다 오히려 험악해진 얼굴로 피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서슬에 방안 공기까지 얼어붙는 듯 했다.

 

아벨린. 이래서야 시작도 전에 끝나겠군. 좀 진정하는 게 어떻겠나.”

제가 흥분하기라도 했나요, 톨비쉬?”

그럼 말을 바꾸지. 표정 좀 풀게, 아벨린. 자네가 화난 이유는 잘 이해하고 있으니 굳이 그렇게 얼굴에 써둘 필요는 없네.”

지금 장난하는 건가요?”

나는 이 일을 최대한 가볍게 처리하고 싶을 뿐일세. 이건 단장님이나 원로회의 의견이기도 하네. 심각하게 다룰 필요도 없거니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해. 자네도 알지 않나.”

 

술렁이는 기사단 내부 분위기를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장들을 소집하기까진 했다. 그러나 일정 정도를 넘어 험악한 분위기가 되는 것까지는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아직 어리거나 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단원들은 주변 분위기에 곧잘 휩쓸린다. 그러나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 외부 요인 탓으로 휘둘리는 일은 없는 편이 좋다.

 

이 이상 혼란이 가중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만, 카즈윈.”

듣고 있어.”

이번 일은 당신의 독단이었다고 해도 될까요?”

“‘해도 될까요가 아니라 독단이죠. 상의 한 마디 없이 저질렀잖아요?”

아니,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카즈윈은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시신을 화장했고 우리 셋을 포함한 나머지 지도부는 기사단원의 시신이 사도의 재료가 될 가능성을 이번에 인지한 걸로 했으면 하네.”

뭐라고요?”

 

펄쩍 뛴 건 아벨린이었다. 등을 곧게 펴고 한껏 몸을 뒤로 빼고 있던 그녀는 테이블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 당장이라도 톨비쉬에게 달려들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톨비쉬는 카즈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카즈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내 독단이었어.”

카즈윈……!”

 

피네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 카즈윈의 팔을 잡았다. 톨비쉬의 제안대로 일을 처리할 경우 카즈윈이 질 부담이 무척 커질 게 눈에 보일 듯 훤했다. 그의 탓이 아닌 일로 숱하게 원망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징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즈윈은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피네의 손등을 한 번 도닥였다. 들어 올려 잡혔던 쪽, 오른손에 얹어서는 한 번 힘주어 잡더니 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톨비쉬를 보고 있었다.

 

조원급 이상의 단원의 장례는 화장으로 처리할 것을 건의하겠어.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으니 그 재 또한 남기지 않을 것 또한.”

카즈윈,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 부담을 혼자 다 지겠다고요?”

 

아벨린의 얼굴은 이미 방에 들어올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 모든 사항은 비단 그만의 결정이나 주장이 아니라 지도부 전원이 동의한 바였다. 카즈윈은 일부러 그 내용을 다시 선언함으로써 그 모두를 완전히 그만의 책임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카즈윈은 아벨린과 잠시 시선을 맞췄다. 카즈윈은 그녀에게 대답 대신 더한 것을 안겨주었다.

 

……한 가지 더. 최근 일 년 이내에 사망한 단원은 전부 화장할 것까지.”

 

방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톨비쉬마저 표정을 굳히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나, , 그리고 셋까지의 정적.

 

……과격한 제안이군요.”

당신이 할 말은 아닐 텐데.”

 

그 말의 의미를 눈치 채기에는 피네도 아벨린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톨비쉬는 쓰게 웃는 것으로 무마했다. 카즈윈이 덧붙이지 않았다면 그 자신이 추가적으로 덧붙이려던 사안이기는 했다. 그보다야 좀 더 온건한 말을 고르기야 했을 것이다.

 

제가 추가적으로 제안하는 식은 어떻습니까.”

간단할수록 좋아. 이번엔 내게 넘겨.”

좋습니다. 그렇게 보고하도록 하죠. 전부 짜고 치는 연극은 아니게 되었지만 피네, 아벨린. 두 사람도 잘해주셔야 합니다.”

잠깐…… 마지막은 뭐예요? 묘지를, 무덤을 파헤치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아벨린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서버렸다. 너무 놀란 탓에 약간 자세가 엉거주춤했으나 그녀는 곧 똑바로 섰다. 피네는 그녀가 또 화를 낼까 순간 긴장했다. 그녀를 말리려 언제든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는데, 아벨린의 입을 통해 쏟아진 건 고함소리가 아니라 한숨이었다. 피네는 그제야 그녀 얼굴에 분노가 조금도 나타나있지 않은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거기까지 생각했죠?”

…….”

……됐어요. 지금 이 난리가 어떤 이유에서 기인했는지는 알아요? 단원들이 무엇에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 아냐고요.”

알고 있어.”

이 모든 게 당신 독단이라고 하면 그들 중에 분명 당신을 배척하려는 자가 생겨요. 그런데 그걸 가중시키겠다고?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어요?”

 

혼란과 걱정, 약간의 죄책감과 좌절까지 뒤섞인 탓에 아벨린의 목소리는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피네는 그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카즈윈의 부담이 너무 컸다. 같이 짊어져야 할 짐을 그에게 전부 떠맡기고 있는 꼴이었다.

 

무덤을 파헤쳐야 할 필요성은 부연설명 없이도 그들 모두 말이 형태를 갖춘 그 한순간에 이해했다. 용암에 몸을 던져 시신 한 조각 남기지 않으려 했던 피네의 선례가 있어 뼈저리게 통감하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문 안에 갇혀 있지만, 선지자들은 그들의 의식을 속이고 이 아발론 게이트 안에 너무나 쉽게 침입했다. 그들처럼, 혹은 그들 이상으로 의식을 속일 수 있는 적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므로 모든 가능성은 배제해야 했다. 알반 기사단의 묘지에는 신성력을 가졌던 자들 수백이 흙을 덮고 잠들어 있다.

 

카즈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말해 뭘 하겠어요. 그런 제안까지 했다는 건 당신이 이번 사태에 꽤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들을 겪고도 당신을 믿지 못한다고는 안 해요, 저도.”

 

카즈윈도, 피네나 톨비쉬도 그녀의 말은 의외였던 모양이지만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놀란 얼굴이었다. 안 해요, 중얼거리듯이 입안에서 그 꼬투리를 굴려보던 아벨린은 침착해진 얼굴로 카즈윈을 한 번 마주보고,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더 의논해야 할 일이 없다면 전 이만 임무로 복귀하겠습니다.”

 

톨비쉬는 잠시 지체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린은 미련 없이 방을 떠났고 그녀가 비운 자리를 채운 침묵이 무겁게 제 존재를 피력했다. 으흠, 톨비쉬가 다른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아마 별다른 징계는 없는 방향으로 해결되겠지만 조만간 연락이 갈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카즈윈. 헤루인 조에도 인원을 보충해야 할 테고 말이죠.”

……그러지.”

 

짧은 인사 후, 방에는 다시 둘만 남았다. 카즈윈의 조원은 아발론 게이트에 있으니 그야 급할 게 없지만 피네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망설임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즈윈은 생각할 게 있는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도 가야겠다. 몸조심해, 카즈윈.”

너도, 피네.”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던 피네는 걸음을 멈췄다. 카즈윈의 세 번째 제안을 들은 순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 망설임의 기제였다. 피네는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카즈윈.”

.”

……이번에 사망한 조원 말이야. 그 사람 안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사명을 위해 삶을 바쳤으니 그 죽음은 평안해야 할 것이다. 사명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안식을 얻은 자들의 유해를 다시 한 번 땅 위로 끌어내어 불에 던지는 일은 결코 기꺼운 게 아니었다. 더구나 책임졌던, 그러나 살리지 못한 목숨이라면 더더욱. 피네는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글쎄.”

아냐?”

……아니진 않아.”

 

솔직하기를 어찌나 어려워하는지. 그런 식으로밖에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그 말은 마침표나 다름없다. 피네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가, 한 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위로하고 싶은 건 제 욕심일 뿐, 그는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았다.

 

 

 

준비 됐습니다, 조장님.”

 

카즈윈은 몸을 일으켰다. 조원이 쌓아둔 장작더미 앞에 다다른 그의 팔엔 영원한 잠에 든 기사가 안겨 있었다. 제 사명을 다하고 부러진 검이다. 카즈윈은 그 검을 장작 위에 뉘였다. 뻣뻣하게 굳기 시작하는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도 배 위에 겹쳐 올렸다. 그러고서 그 손과 감은 두 눈을 제 손으로 덮었다. 그는 소리 없이 기도했다.

 

한 평생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벼린 칼날의 삶을 살았던 당신의 검에게 한 조각 안식을 주소서.

 

그는 손을 떼고 물러났다. 옆에서 건네어지는 횃불을 받아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작더미에 불을 놓았다. 순식간에 커진 불은 자신이 품은 것의 무게를 아는지 더 세차게 타올랐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즈윈은 그 자취를 아주 오래도록 눈으로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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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이었다. 밤짐승의 눈이 아니고서는 횃불 없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어두운 숲 속이다. 아이르리스는 무리의 가장 앞에 서서 횃불을 높이 들어올렸다. 발밑, 그리고 등 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녀의 등 뒤에는 견습이라고도 불리지 못하는 기사단의 일원들이 서넛 딸려 있었다. 아이르리스의 이번 임무는 임시조의 조장을 맡아 그들을 책임지는 동시에 전투가 끝난 정식 조원들의 뒷정리를 하는 것. 이 정도는 밀레시안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벨테인 조의 일원인 제 능력에 당연한 부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강박적으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옷은 이미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곧 지시받은 지점에 도달한다. 스며들기 시작하는 안도감과 머리 바로 위까지 들어 올린 횃불 때문에 아이르리스는 뒤의 조원보다 한 박자 늦게 연기자락을 발견했다. 지시받은 지점이 틀림없는 그 위치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신호라던가 밤공기를 견디기 위한 캠프파이어 크기는 절대 아니었다. 삽시간에 조원들 사이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아이르리스는 뒤로 돌아 크게 호통쳤다.

 

조용히! 이만한 일로 허둥대서 어쩔 거지? 대형 유지하고, 빨리 움직인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도 침착하지 못한 탓에 대열은 흐트러졌다. 허둥지둥 달리다시피 움직여 지점에 도착한다. 기르가쉬만한 사도가 난리를 친 곳이라 이제 막 생겨난 것과 다름없는 공터 주변은 엉망이었다. 그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을 둘러싼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르리스는 그녀보다 한 발짝씩은 꼭 늦는 조원들에게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 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인 것이다. 아이르리스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번에 지원할 전투조는 괴짜라고 소문난 카즈윈 조장님의 헤루인 조…….

 

그리고 아이르리스는 결국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피네는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려 심호흡을 하며 걸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야 되지만 당장 맞닥뜨릴 미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며 할 말을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원만하게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워지자 그녀의 당면한 과제가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보였다.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으니 아마 그 입술은 너덜너덜할 것이다. 피네는 안쓰러운 마음에 이름부터 불렀다.

 

아벨린.”

 

아벨린은 대답하기에 앞서 가슴을 부풀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 말도 못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들이쉰 숨을 아주 길게 내쉬었다. 랜스의 손잡이를 움켜쥔 손 또한 떨고 있었다. 피네는 그녀 옆의 알터에게 눈짓했다. 알터는 화들짝 놀랐다가 아벨린을 한 번 보고, 다시 피네를 본 다음에 바닥을 보았다. 그러나 오래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벨테인 조 견습 기사들을 향해 멀어져갔다.

 

그것으로 아벨린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아벨린은 정자세로 들고 있던 랜스를 세우고 입을 틀어막았다. 한 번 걸러졌어도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 남자는 생각이 없는 거야? 일을 도대체!”

아벨린, 일단 진정해봐. 너무 흥분했어. 다들 보고 있어.”

 

피네는 일부러 한 번 제 등 뒤를 향해 눈짓했다. 아벨린은 그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으므로 진정까지는 아니어도 분을 삭이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피네는 그녀가 숨을 고르는 박자에 맞춰 다가가 손을 잡았다. 아벨린은 손을 빼고 싶어했지만 피네가 놓아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심호흡 후, 아벨린은 훨씬 차분해진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인 거야, 그 남자는? 너는 알지.”

……. 그리고 아벨린, 너도 알잖아. 카즈윈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아벨린은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한 번 입술을 빨고, 숨을 크게 내쉬며 피네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준다. 그러고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내 말은, 아직 기사단 전체에 공표하지도 않은 시점에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른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는 거야. 지원이 올 걸 알았을 거 아냐? 아직 어린애들이야. 그 남자가 어떻게 보였겠어?”

 

피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벨린의 지적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박하고 싶은 것과 별개로 인정해야 할 부분은 분명 있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그녀와 언성 높여가며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들을 주시하는 눈동자가 수 쌍이었다. 슈안, 알터, 그리고 벨테인 조의 다섯 명. 가장 오른쪽 끝자리가 비어있었다. 사건을 목격한 아이는 밀레시안이 잠시 데려갔다고 보고 받았던 기억이 났다.

 

이제…… 설명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곧 공표될 일이었잖아.”

……이렇게 알려질 일이 절대 아니었어. 다들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나도 아직까지 이렇게…….”

 

피네는 결국 아벨린의 손을 놓쳤다. 아벨린은 풀려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피네는 조금 움직여 사람들로부터 아벨린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로 신음과 함께 말이 샜다.

 

시신을…… 태운다니…….”

 

에린의 장례 풍습은 기본적으로 매장이다. 어느 마을이나 묘지가 있었고 성당이나 교회가 관리를 맡는 형식이었다. 산 자는 죽은 자의 묘비를 쓸며 위안 받는다. 큰 돌을 깎아 만들기 마련인 비석엔 Rest In Peace라고 적혔다. 편히 쉬소서. 이제 아무 걱정 없이 눈감고 편히 쉬소서.

 

그러나 이제 알반 기사단의 정식 기사 이상, 어쩌면 기사를 목표로 삼았거나 한 때 기사였던 자들 중 그 누구도 땅 속에서 편히 쉴 수 없을 것이다. 피네는 선지자들의 목표를 되새겼다. 살아있는 사람, 시체, 신성력을 가진 사람. 그들이 유일하게 실패했던 마지막 목표는 신성력이 있는 시신이었다. 알반 기사단의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그 누구도 초대 단장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신성력일 테지만 만에 하나일지 모를 가능성 때문에 지도부는 앞으로 발생하는 사망자는 화장하기로 결론지었다. 다만 어느 등급부터 그런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는 아직 논쟁 중이었으므로 조장급 이하에게는 결사단의 일원이었던 알터를 제외하고는 기밀사항이었다. 이 사항은 아직까지도 논쟁 중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카즈윈은 조원급 일원의 화장을 치렀다.

 

땅속에 뉘여야 할 유해를 태우는 행위는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헤루인 조의 뒤처리를 도우러 나갔던 아이르리스가 목격한 연기자락은 시신을 태우던 불이었다. 쌓아올린 장작, 그 곁에서 불을 쬐던 사람은 둘 뿐이었다. 도착했음을 보고하고 할 일을 묻자 불 옆에 앉아있던 조원이 잠긴 목소리로 장례중이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정적은 길지 않았다. 어린 견습 기사들은 그제야 보통 크기보다 훨씬 큰 캠프파이어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았고…… 피네는 그 후 벌어졌던 소란에 대해서는 회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녀가 조원들을 임무지에 대기시켜두고 아발론 게이트에 올 이유는 소집 명령 외엔 달리 없었다. 피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즈윈은…… 이미 와 있다고 들었는데 만나는 봤어?”

침착하게 마주할 자신 없어. 톨비쉬까지 다 모이기 전에는 보지 않을 거야.”

……그래. ……아벨린, 그럼 그 때 보자.”

넌 그 남자한테 너무 물러.”

 

모를 것 같지는 않지만. 아벨린은 잠시 쉬고 덧붙였다. 피네는 부정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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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라크가 퀘스트로 날려주긴 하지만 이런 게 보고 싶어서 써봅니다 설정 날조 주의

 

 

 

  네 이름을 잊지 않겠다. 그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가져가며 그 한 마디를 주고 갔다. 내 잘못이 없다 확신하면서도 그 때 그 얼굴,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더는 서 있을 수 없을만큼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는 한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는 내 이름을 발음하며 증오를 담았고, 나는 그 후로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다른 밀레시안들은 수면 없이도 기능할 수 있다던데 이 몸뚱어리는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은 것처럼 후들거렸다. ……정확히는 내 영혼이었다.

 

"가멧 씨?"
 

  창백한 드루이드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나는 퍼뜩 놀라 움켜쥔 스태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
"피로……라고요? 밀레시안들은 어떻게 피로를 해소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똑똑한 사람이니 밀레시안의 생리 상 피로라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 것이다. 설명을 바랐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보다 부탁하실 일이라는 게……?"

 

  마음을 가다듬고 시선을 들자 그는 착잡한 얼굴로, 또다시 미안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오래도록 말을 고르고 다듬은 후에야 꺼내놓곤 했다. 그가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그 정성스러운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말을 꺼내기 전 잠시 지체하는 이 시간동안 이미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엔 그에게 감사할 일도 있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정말 나를 도우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루에리의 일입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가멧 씨."

 

  직전까지도 그에 대한 생각을 하던 차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얼굴을 굳히는 것을 보더니 그는, 타르라크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거절하리라 생각했는지 못내 미안해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의 행방을 꼭 찾고 싶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압니다.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감히 부탁드립니다. 저를 봐서라도 제발……. 그도 어찌 보면 여신의 피해자가 아닙니까."

 

  하얀 입김이 가장 큰 피해자의 얼굴을 가렸다. 내 눈에는 그가 스스로를 숨겨 루에리를 가장 큰 피해자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루에리의 가해자는 그의 아버지였고 나였으며, 마지막은 그 스스로였다. 타르라크가 스스로의 고통을 깎아가면서까지 그를 포장할 필요는 없었다. 설사 루에리가 가해자였다 하더라도 그의, 타르라크의 부탁이라면 나는 움직였을 것이므로. 내게는 기실 가해자나 다름없었다.

 

"……알겠어요. 내가 할 일이 뭐죠?"

 

  그는 퍼뜩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감사인사를 하며 안도한 그의 창백한 얼굴에 잠시 핏기가 돌아왔던 것으로 셈을 끝냈다. 설원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맨 몸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무슨 대가를 바란단 말인가. 그가 멀쩡히 살아 숨쉬는 게 감사한 일이었다.

 

  타르라크가 건네어 준 갑옷 조각을 받아 품에 잘 갈무리하고, 나는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쓰고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비록 드래곤에 의해 우호적인 형태로 거두어졌다고는 해도 루에리는 당시 중상이었다. 다난의 몸으로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말에 오르기 전, 나는 안장 뒷편에 매어 둔 짐에서 푸른 꾸러미를 꺼냈다. 늘 건네받던 것인데도 안쓰러운 그는 매 번 미안해했다.

 

"도움 될 만한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드루이드일 뿐인데……."

"매번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늘 말하지만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가 스스로를 낮출 때마다 울컥 억울함이 치솟곤 했다. 이것마저 없으면 큰일이 난다면서도 한 번을 기껍게 받으려 하지 않았다. 쓰게 웃는 그의 손에 또 마나허브 꾸러미를 쥐여주고 그 손을 힘주어 잡았다. 설원에 뿌리 내린 손이 먹을 것이라고는 냉기 밖에 없어 무척 차가웠다. 나는 늘 그에게 더 해주지 못해 미안했다.

 

"미안하다 하지 말고 고맙다고 해주겠어요?"

 

  내 말이 예상 밖이었는지, 네모난 안경 너머 두 눈이 동그랗게 몸을 부풀리더니 나를 본다. 새하얀 설원, 검은 돌더미 무채색의 세상에 그만이 색을 가졌다. 그 빛이 바래고 있는 것이, 더 바랠 것이 지금으로썬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도…… 나도 당신 친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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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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