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 듀얼리스트들의 일원인 첼군(http://duelists.tistory.com/7)을 빌렸(?)습니다. 카즈윈+밀레

 

 

 

 

 

  훈련과 관련한 몇 가지 지시, 임무 확인, 부상자 치료 등 제 할일을 마친 첼은 게이트 밖 적당한 곳에 드러누워 있었다. 볕은 따사롭고 절벽의 그림자가 얼굴을 적당히 덮는 시간은 낮잠에 최적이다. 밀레시안의 몸에 수면은 필요 없지만, 첼은 종종 드러누워 시간을 때우곤 했다. 닷새 쯤 전에 임무를 보냈던 조원 하나의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풀잎 밟는 소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첼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로서는 드물게도 놀라움으로 두 눈이 커졌다. 카즈윈이었다.

 

"첼."

 

  의도 없이 이름만을 부르는 행위엔 으레 감정이 실리기 마련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니 반갑다는 뜻일 텐데, 저 무기력한 얼굴에서는 도통 속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첼은 그 자신도 얼굴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별일이네."

"맞춰볼 게 있어서."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첼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영문을 모르게 앞뒤 다 잘라먹은 말이 잠시 짜증을 돋웠지만, 첼은 도로 몸을 뉘였다. 이 장소가 아발론 게이트에서 시간 때우기에 가장 좋은 명당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나보다. 다행히 카즈윈은 이것저것 묻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있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지도 않았고.

 

"팔자 좋게 쉬러 온거야?"

"해야할 건 끝냈으니까……. 애써 더 귀찮을 필요는 없지."

"아벨린한테 일러준다."

"귀찮은 건 싫어……."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리긴 했어도 제 느긋함을 이길 수 있는 이는 다난에도, 밀레시안에도 몇 없었다. 개중에도 카즈윈은 독보적이었다. 저 걸치다 만 갑옷도 드러누울 때 조금 더 편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을 때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엔 좀 변했나 싶더니, 역시 본질은 저 쪽이 맞는 것 같다.

 

  드러누울 것처럼 앉아있던 카즈윈이 문득 입을 열었다.

 

"……첼."

"응?"

"특별조를 어떻게 생각하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첼은 우선 침묵을 택했다. 몸을 옆으로 굴려 모로 누웠다. 단련된 기사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 등이 반 바퀴 돌더니 푸른 눈동자가 그를 마주보았다. 여전히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뭘 묻는 거야?"

"단순히 당신의 감상."

"기사단의 질문인가?"

"아니, 그냥 내가 궁금할 뿐이야."

 

  퍽 끈질기게 물어오는 것이 마치 처음 만났을 때 같았다. 성가신 탐색 끝에 만난 그는 다짜고짜 대련을 신청해왔다. 마법사에게 달려드는 근접전사라니, 지금 생각하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어쩌다 받아들였었는지까지 기억을 더듬어보고나서, 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때처럼 저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두고 떠난다는 선택지가 있는 것도 같았지만, 첼은 적당히 대답해서 넘기기로 마음을 정했다.

 

"뭐, 그냥 저냥. 잘 따라오는 것 같으니 그걸로 됐어."

"누가 가장 마음에 들지?"

"이봐, 웬 중매쟁이야? 그런 거 없어."

 

  카즈윈은 고개를 저었다. 첼도 물론 그가 제 연애사업 따위에 관심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 직설적인 질문에 숨은 의도가 전혀 짐작되질 않는 것이다. 선문답은 때와 장소, 사람만 받쳐준다면 즐거운 오락일 수도 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첼은 팔을 세워 머리를 괴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첼. 평생 그렇게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살 건가?"

 

  등골이 서늘한 질문이었다. 머리를 괸 손의 관절에서 뚝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가방에 넣어둔 둔기가 미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첼은 카즈윈을 노려본 채로 가방에 손을 뻗었다. 첼이 대답하지 않자 카즈윈은 말을 이었다.

 

"아까 조원들과 있던 모습을 봤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던데."

"……."

"……마음 주는 게 두렵나?"

"우리가 그런 걸 묻고 대답할 사이던가?"

 

  손에 쥔 자루를 통해 진동이 전해진다. 마스터, 하고 부르는 소리도 들렸으나 첼은 모르는 척했다. 건드린 건 저쪽이다. 첼이 힘주어 자루를 쥐자 둔기의 정령은 제 주인에게 호소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엎어버릴 마음까지는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엎지 않을 정도의 분노였다.

 

"평생? 언제 끝날지도 모를 그깟 한 번의 인생을 마치 영원처럼 이야기하는데?"

 

  밀레시안인 그의 입을 거쳐 나온 그 단어는 상상도 못할 무게가 되어 있었다. 그깟 한 번의 인생이라는 건 다난에게나 해당되는 말일 터다. 환생이라는 특권을 누리는 밀레시안들은 그 특권의 대가로 영원의 굴레를 짊어진다. 감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카즈윈은 피네가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밀레시안의 삶은 행복하느냐 물었을 때 첼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쩌고 싶은지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야? 밀레시안과 다난의 삶은 그 속도가 달라. 너무도 달라. 함께하다니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지."

"함께라."

 

  첼은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이렇게 멍청할 데가. 금발의 기사와 늙은 마법사는 이제 그의 머릿속에선 다른 사람이되 같은 사람이다. 아직 놓지 않은 둔기의 자루가 크게 떨었다. 첼은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카즈윈은 관찰력도 좋은데다 눈치도 빨랐다. 제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만해. 더 하면 화낼 거야."

"……그래. 그러지. 하지만 첼."

 

  첼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당장에 아발론 게이트를 뜰 것이다. 길드던 손안의 정령이던 다른 곳, 다른 존재들이 절실했다. 저 다난은, 이 에린은 나와 섞일 수 없다. 그 아득한, 좁혀지지 않을 거리감을 모를 너 다난이 내게 그 단절에 대해 물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같은 밀레시안들에게조차 말하지 않는 마음이다.

 

"뭐. 불렀으면 말을 해."

"……당신의 삶은 정말 영원이 아닌가 해서."

 

  그것은 어떠한 선고와도 같았다. 다난이, 에린이 내리는 선고. 들끓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잃을 게 두려워 처음부터 놓아버리지는 않았으면 해. 그게 당신에게도 이로울 거라 생각하니까."

"……네가 걱정할 거리는 아니지."

"……그래."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카즈윈을 뒤로 하고, 첼은 숨겨진 입구 쪽으로 걸었다. 머릿속이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화가 나는 것도 같고, 동시에 다른 어딘가는 가라앉는다. 뒤죽박죽이었다. 첼은 언덕을 오르다 문득 제 손에 쥐인 무게를 깨달았다. 둔기의 정령은 조용했다. 침묵으로써 위로하듯이. 첼은 자루를 두 손으로 꾹 쥐었다.

 

  사무치게 추웠다. 홀로 남겨진 것처럼.

 

 

 

 

 

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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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밀레(사난사 : http://duelists.tistory.com/8)+톨비쉬+타르라크

 

 

 

 

  주위에 몬스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사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엄한 곳에서 고삐를 놓는데도 이젠 일상인지라 그녀의 점잖은 말은 얌전했다. 두고 떠나기 전에 몇 번 쓸어주고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평범한 자들은 인식할 수 없다고는 해도 만의 하나라는 것이 두려워, 난사는 자취를 남기지 않기 위해 으레 타고 온 말을 주위 숲에 풀어두곤 했다. 묶어뒀다가 수정 골렘이나 다른 몬스터들에게 발견되어 도망가지도 못하고 죽는 것보단 잃어버리는 게 낫다 여겼다. 그러고나면 숲에서 숨겨진 입구까지, 또 숨겨진 입구에서부터 유적에 다다르기까지도 꽤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아까워, 난사는 걸음을 재촉했다.

 

  숨겨진 입구는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안을 잘 살필 수가 없다. 그 검은 틈으로 뛰어들다시피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엔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사난사 씨."

 

  대낮에도 어둑어둑한 바깥과는 별세계인 양 환한 햇빛이 내리쬐는 공간. 돌 틈에 뿌리박은 나무의 이파리는 신비로운 푸른색이다. 그 틈으로 내리쬐는 환한 햇빛 속에 그가 있었다. 머리에 태양을 인 양 환한 금발의 성기사. 기억 속의 중갑옷 대신 가벼운 흰 옷차림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만한 변화가 무척 놀라웠지만, 톨비쉬는 갑옷 없이도 정갈한 기사였다. 난사는 빠르게 진정하고 발 디딘 돌 위에서 내려섰다.

 

"톨비쉬?"

"하하, 예. 접니다. 많이 놀라셨나봅니다. 하기야, 소식도 없이 온 제 잘못이죠."

"아니……. 잘못이랄 건 아닙니다. 어쩐 일이시오?"

"아벨린을 만나러 왔습니다. 서면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사항이 있어 부득이하게 제가 왔지요. 도착하고보니 사난사 씨가 늘 이 시간에 특별조를 관리하러 오신다 들었던 게 생각나서요. 기다렸습니다."

 

  이전 제 뒷조사를 한다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나 이젠 정식으로 기사단에 협조하는 몸이니 엘베드 조의 조장인 그가 제 일반적인 일정을 아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터다. 난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왕성에서나 볼 법한 품위로 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볍게 뛰어내려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이전에 중갑옷을 갖춰입은 일행들에 맞춰 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던 버릇이 도로 고개를 들었다. 걸음이 늦어지니 저절로 입이 열렸다.

 

"이전에는 비상사태였다 치고…… 조장씩이나 되는 자가 이렇게 자주 조원들 옆을 떠나도 괜찮소?"

"하하, 걱정하시는 거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만한 사안이기도 하고,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요. 사난사 씨가 또 혼자 무리하지는 않는지 같은 것 말입니다."

 

  서로 뼈 있는 말을 주고받은 셈이다. 난사는 가볍게 웃어버렸다.

 

"아픈 데를 찌르시는군. 지금 시국에 무리라고 해봤자 이전만 하겠냐마는……. 어떻소, 무리하는 것 같습니까?"

"다행히 아닌 것 같군요.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래요, 일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일이 아니라 사난사씨를 걱정하는 겁니다. 자의던 타의던, 사난사 씨는 늘 혼자 모든 것을 떠안아 왔으니까요. 슈안은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가 많이 도와주지요?"

 

  그 말은 여러가지 것들을 상기시켰다. 톨비쉬는 그것이 나쁜 일인 양, 있어서는 안될 일인 양 말하고 있지만, 난사는 떠안지 않는다면 더 괴로웠을 제 성격을 잘 알았다. 그러니 사실 떠안는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그녀는 매번 스스로 긁어모아 끌어안았다. 한 때 힘이 닿지 않아 지키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은, 본래 있던 세계의 것만으로도 모자라 끝나지 않을 밀레시안으로서의 삶마저 지배했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긁어모아도 품에서 흘러내린 것은 더러 있었다. 미처 시선이 닿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결국 둘 다 지키지 못했다.

 

  "사난사 씨?"

 

 퍼뜩 정신이 들었다. 두어 걸음 앞선 톨비쉬가 의아한 기색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직 언덕을 다 내려가지 못해서 아래쪽에 선 그와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그래, 그의 눈높이가 대충 이 정도였을까. 뒤로 한 걸음 내딛어 언덕을 올라가보았다. 이 정도였을까? 사실 기억은 희미했다. 톨비쉬는 그 의미모를 지체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난사는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묻지 않소?"

"……글쎄요. 사실 묻지 말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물어도 되는 겁니까?"

 

  비단 지금의 지체만을 말하는 게 아닐 터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지내며, 눈치 빠른 그에게 제 혼란을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난사는 침묵했다. 대답해줄 것마냥 말하고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스스로가 옹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정갈한 흰 웃옷과 하얀 로브, 금빛 곱슬머리, 정중한 말씨까지.

 

  이제 없는 한 사람은 그녀에게 세계를 위해 죽어달라 했었다. 그 사람으로부터 기인한 일련의 사건이 지금의 톨비쉬와의 관계를 만들었다. 난사는 톨비쉬에게서 타르라크를 찾을 때마다 그 사실을 곱씹곤 했다. 그와 톨비쉬 사이의 공통점, 차이점 따위를 파헤치기에는 타르라크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눈 덮인 산길 끝, 봉인 안에 매여 있던 시절의 마법사에게 주의를 기울일 여력은 당시에 없었다. 과거의 모자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후회스럽다. 당신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몇 번이고 찾아갔어야 했는데, 타르라크.

 

  그 미미한 편린이 종종 저 기사를 당신으로 보게 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난사 씨. 당신의 삶이니까요."

 

  이해한다는 듯 다정스레 건네어지는 말이 그녀 안의 응어리를 건드렸다. 절로 주먹이 꾹 쥐였다. 톨비쉬에게는 당연할지 모를 배려였으나 그가 삶이라는 단어를 지금 꺼낸 것은 최악이다. 나이 든 마법사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신이 그리던 에린에 당신의 삶은 있었나? 악을 자처하고 내게 죽음을 요구할 정도면 살아갈 각오 정도는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눈앞의 사내가 마법사로 보이기 시작했다. 난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소?"

 

  갑작스러운 요구에 주춤하던 톨비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검끝을 땅에 박아넣고 바로 섰다. 한 겹짜리 옷 위에 그의 갑옷이 환영처럼 겹친다. 눈에 새겨진 모습처럼. 난사는 빠르게 눈을 깜빡여 그 환영을 지웠다. 눈앞의 사내는 다시 마법사가 된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예. 얼마든지요."

"잠시 다른 사람이 되어주시오."

 

  그가 당황한 것을 볼 기회는 드물었다. 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사라지고, 금방이라도 무슨 영문이냐 물을 것처럼 입술이 달싹였다. 난사는 단호하게 그를 쏘아봤다. 무슨 말이냐 묻는다면 제대로 정리해서 대답해줄 자신이 없었다. 말이 되지 못한 숱한 것들이 마주친 눈 사이로 오갔다.

 

  아무 말도 잇지 않고, 톨비쉬는 눈을 감았다.

 

"……타르라크."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부른 직후 숨이 막혔다.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아주 많았는데. 물을 것도 많았다. 책망할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쏟아낼 수는 없었다. 쏟아낸다 한들 돌아올 것이 없어 제 마음만 비어버릴 테니까. 그러나 꼭, 하고싶은 말이 있었다. 난사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하오."

 

  이 말만은 돌아올 것 없이 내뱉어져도 좋았다. 큰 짐을 지고 있다가 내려놓으면 휘청이기 마련이다. 난사는 답답해진 가슴에 숨을 부풀렸다. 크게 내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이것으로 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 오랜 시간 괴로울 테고, 어쩌면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일인지도 몰랐다. 허나 짐 하나는 덜은 것이 분명했다. 눈앞의 사내에게서 꺼풀이 한 겹 벗겨진 듯했다. 마법사는 간 데가 없다.

 

"톨비쉬."

 

  눈을 뜬 남자는 기사였다. 아직 입가에 미소가 돌아오지 않아 눈동자가 유독 시린 빛이었다. 난사는 그제야 그에게 미안해졌다.

 

"……큰 실례를 범했소."

"타르라크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 일전에 말씀드렸었죠. 사난사 씨를 꽤 오랫동안 주시해왔다고 말입니다. 음…… 절 대하실 때 뭔가 좀 주춤하시는 것 같더니 이제 좀 알겠군요. 제가 그렇게 그와 닮았습니까?"

"……조금이라면."

 

  난사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톨비쉬는 땅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방패에 도로 대검을 꽂아넣으면서도 그의 입가엔 아직 곡선이 돌아오지 않았다. 속을 짐작할 순 없어도 늘상 웃던 사람이라, 그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것 같기도 했다.

 

"자세한 얘기는…… 힘드십니까? 이제까진 당신에 대한 예의로 묻지 않았습니다만, 이젠 그 예의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힘듭니다."

"그렇습니까……."

 

  톨비쉬는 낙담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 고민하는 그를, 난사는 가만히 보았다. 이렇게 일부라도 누군가에게, 그에게 말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원히 제 속에만 품어갈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꽉 매어둔 입구에 틈을 벌린 건 다름아닌 바로 그였다. 그가 제게 해준 한 마디 말이었다.

 

  함께 하겠다 해주었다. 모두 혼자 짊어지지 말라 해주었다. 그 말이 가장 바라던 구원이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찾아온 어떠한 예감 같은 것이 아직도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

 

"아직 힘들다는 말은, 언젠가 괜찮아지면 얘기해주실 수도 있다는 뜻이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 뜻이 맞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이 기약없는 답에도 만족해주었다. 입가에 다시 미소를 돌려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또다시 그 예감 비슷한 것이 찾아든다. 난사는 걸음을 옮기며 예언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되새겼다. 톨비쉬는 그녀가 제 옆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걸음을 뗐다. 다시 나란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 두 사람 뒤에 나뭇가지가 드리운 그림자가 무성했다.

 

 

 

 

 

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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