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며칠 어깨가 결렸다. 에레원은 입을 꼭 다물고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그 어디에서도 마음 편히 혼자 있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시중인들이나 이곳저곳에 심어진, 그녀의 흠을 찾으려 애쓰는 쥐새끼들의 귀와 눈 따위를 생각하면 더 당당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에레원은 어깨를 펴고 표정을 단단히 했다. 세 개의 단을 올라 발판 위에 오른다. 부드럽게 뒤돌아 의자에 몸을 내렸을 때 그녀 앞에 고개를 든 자는 없었다. 오만한 여왕의 목소리가 높은 천장에서 내리꽂히는 듯하다. 단상 아래 허리를 굽히고 있던 남자가 몸을 바로 세웠다. 여왕은 여보란듯이 미소 짓고 있는 그 입이 준비한, 쓸데없이 장황하기만 할 인사치레를 미리 망쳤다.
“해서, 급히 요구할 것이라도 있소? 이런 시기에.”
“요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 영지와 가문은 이미 여왕폐하께 귀속된 바, 폐하의 애정 어린 관심에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저는 그저 신하된 도리로써 가문의 일을 돌보던 중, 수도가 지척임에도 폐하께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영지로 돌아가는 걸음을 조금 늦추었을 뿐입니다.”
남자는 자칫 위협으로 들릴 수 있는 권위적인 말에 조금도 주눅 든 기세가 아니었다. 여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갖가지 정보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랐으나 순서를 갖추기엔 단서가 부족했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이런 시기에 굳이 그 먼 영지에서 수도까지 한 달음에 달려왔을까. 무엇이 켕겨서.
여왕은 다시 한 번 남자의 행색을 훑었다. 나무랄 데 없이 번듯한 의복과 전통적인 예법이었다. 적당히 큰 키와 마른 턱, 그 먼 시골 영지에서 이제 막 올라온 것 치고는 수도 귀족들의 유행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으나 백작 부인에게 들렀다면 또 모를 일이다.
여왕은 누그러진 척 조금 전보다는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왕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얼음처럼 냉랭한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대의 가문은 늘 왕가에 충성스러운 신하였지. 관심으로 굽어 살피는 것은 왕가의 당연한 의무요. 비록 후작의 얼굴을 대관식 이후로 본 적이 없다 해도 내 그 가문의 충성심까지 모르진 않지.”
“폐하의 과분한 은총에 보답할 길이 없군요. 아버님의 건강이 긴 여정을 감당하지 못하여 오시지 못하는 걸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주십시오.”
“저런, 후작에게 지병이라도 있는 겐가? 내 미처 듣지 못했는데.”
“염려 감사합니다만, 아버님께서 오랜 여행을 감당할 나이가 아니실 뿐입니다. 괜한 걱정으로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십시오.”
마십시오. 저렇듯 단호한 거절이라. 여왕의 눈썹이 아무도 모르게 위로 치솟았다. 이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노여움이었다. 감히, 왕에게, 명령을 해? 그러나 속내와 달리 말씨는 너그러웠다. 그의 목적을 알아야 했다. 전능치 못한 왕권이란 눈치싸움과 뒷공작의 연속이었다.
“그대도 오랜 여정으로 지쳤겠지. 왕성에 몸을 의탁하겠는가? 나의 성은 늘 그대와 같은 충성스러운 신하를 환영하네.”
“크나큰 배려와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베푸신 친절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에 맞춰 저도 드릴 게 있어야지요. 저희 영지의 특산품인 차를 좀 가져왔는데, 어떠십니까? 제게 직접 대접하는 영광을 허락해주십시오.”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도, 아이도 없는 홀몸이기에 왕가의 대접이란 그녀 혼자만의 몫이었다. 기껍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마음을 다졌다. 그녀는 강한 왕이 아니었다. 가진 패가 적으니 지금처럼 직접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허락의 말을 내려던 여왕은 손을 들었다. 열린 입술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잠시.”
지긋한 나이의 시종장이 왕좌에 앉은 그녀의 시야 안으로 발을 들인 것이다. 에레원은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락했다. 시종장은 그녀의 귓가로 몸을 숙였다. 노년의 시종장은 어린 여왕을 무척이나 안쓰러워하며 충성하는 부류였다. 달리 말하면 쓸 만한 수족이었다. 그는 일전에 일러둔 대로 적당히 단상 아래의 남자가 엿들을 수 있을 만큼 목소리를 내어 보고했다.
“세미테일님이 오셨습니다.”
세미테일, 그건 세간에도 널리 알려진 반신의 이름이었다. 여왕은 작게 미소했다. 단상 아래의 사내가 놀라 움츠러든 제 어깨에 애써 힘주어 펴는 모습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절로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담겼다. 그게 진심이던 계산이던 그녀의 적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구분이었다.
“아, 벌써 그렇게 되었나.”
“정무 중이시라면 조금 기다리겠다 하셨지만, 폐하께서 괘념치 말고 알리라 하셔서 바로 말씀 올립니다.”
“그래, 알겠다.”
에레원은 몸을 바로 하며 왕좌의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단상 아래의 사내는 반신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부터 무언가를 예감한 듯했다. 침착한 자였다. 눈치도 빨랐다.
“귀한 분이 오셨군요.”
다만 녹록한 자가 아니었다.
“이 나라에, 그리고 폐하께 무척 중요한 분이시니 이번만큼은 제가 물러나야겠군요. 내일쯤 불러주시겠지요?”
순간, 사내의 눈이 위로 솟았다. 한순간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격식과 친근감을 얹은 말과는 달리 서늘한 시선이었다. 여왕은 저것이 미처 가리지 못한 불만임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눈을 내리까는 그의 정수리를 여왕은 너그러이 용서했다. 강자는 여유로운 법이었다. 그녀의 칼이 지척에 있었다. 반신은, 제 손잡이를 오로지 여왕에게만 허락했다.
“그러지. 내일 부르겠네. 편히 쉬게나.”
그는 인사를 올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유명한 이야기였다. 여왕과 반신의 남다른 친분, 주기적으로 열리는 공중정원에서의 단 둘뿐인 티파티. 오로지 여왕에게만 향하는 반신의 애정. 귀족들 사이에선 다른 의미로 주시되고 있는 시간이었다. 여왕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는 그것을 무기로 삼았다. 전면적으로 그녀에게 반발하는 귀족이 없는 것은 그 덕이었다. 반신의 힘은 웬만한 군대를 웃도는 때마저 있다.
여왕은 단상에서 내렸다. 사내에게 보여주듯 부러 거침없이 걸어 배경처럼 선 시녀들이 조용히 연 문을 향했다. 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폐하께 무척 중요한 분이시니…….
에레원은 쓰게 웃었다. 머리에 얹힌 것의 무게가 새삼스러워 목이 꺾일 것 같았다.
정원사의 솜씨가 좋아 정원은 늘 아름다웠다. 세간에 알려지길, 어딘가 소녀 같은 구석이 남은 여왕의 취향대로 색색별 계절꽃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고 했다. 백성들은 막 왕위에 올라 머리에 관을 얹던 소녀를 기억했고, 그 전설과도 같던 시절을 사랑했다. 우리 여왕님 풋풋하기도 하시지, 그 고초를 겪으시고도 소녀 같으셔. 여왕을 안쓰러워하는, 동시에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꽃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피었다. 그리고 그 꽃무더기, 백성들의 애정 어린 지지는 여왕의 가장 단단한 정치 기반이었다. 이제 그녀가 왕이라는, 그리고 성숙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는 있어도 우습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그 사랑과 저 바다 건너 벨바스트의 제독이 보내는 계산된 충성에 더불어, 소녀는 살아난 목숨을 잘 가꾸었다.
살아난, 목숨이었다. 여왕은 가면을 벗고 목을 가다듬었다. 모시는 이가 모두 물러갔으니 더 이상 설렘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둘 필요가 없었다. 여왕은 과거로, 순수했던 어린 공주로 돌아갔다. 들뜬 소녀가 되어 가장 사랑하는 이름을 외쳤다.
“세미테일!”
“꺄악, 에레원!”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뒷모습이 기다렸다는 듯 뒤돌아 에레원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가슴께에 겨우 머리가 닿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취향을 강력하게 주장하듯 짙은 자주색으로 온몸을 휘감은 여자애. 마지막 양심인 것처럼 단정하게 양갈래로 묶은 긴 은발, 폴짝이는 뜀박질이나 해사하게 웃는 통통한 뺨. 그 누구라도 어린아이라 생각할 외양과 행동. 에레원의 두터운 옷 때문에 등 뒤로 맞물리지도 못하는 작은 품과 손.
에레원은 저 작은 손에 이끌려 살아났다.
“보고 싶었어!”
그 작은 손은 조금 무섭다 싶을 정도로 세게 허리춤을 움켜잡고 있었다. 에레원은 그 절반이라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세미테일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비록 절반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할 힘이라도.
“……나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좀 더 활기찬 대답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조금 전 마주한 서늘한 사내의 시선이 아직 뒷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반신은 그 별 것 아닐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진지한 목소리에 마음이 더 쑤셨다. 그래, 너는 내 말, 행동, 숨소리 하나에도 이렇게 예민한데 나는, 보답은 하지 못할망정…….
“네가 너무 오래 안 와서 그렇잖아. 이게 얼마만이니?”
그러나 속내를 숨기기엔 토라진 체하는 게 제일이었다. 세미테일을 오래 보지 못해 섭섭했던 마음도 사실이었다. 어렸을 땐 어땠더라, 좀 더 자주 오지 못하겠냐고 화를 냈던가. 이제 그럴 나이는 아니었다. 에레원은 정말 그녀가 자신 때문에 삐진 건가 싶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세미테일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반신은 웃음만큼이나 움츠러드는 정도가 과했다.
“미, 미안해……. 그게, 오려고 했는데……!”
“미안하면 오늘은 자고 가. 나랑 같이. 두 달이나 돌아다녔으면 이야깃거리가 많겠지? 그 전에 티타임부터. 이 정도면 용서해주겠어.”
에레원은 짐짓 화난 척 손가락을 흔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사르륵 녹았다. 아, 정말이지 에레원은 세미테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하게 웃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럴까? 그럴까? 우리 에레원이랑 같이 잘까, 오늘은!”
“그럴까가 아니라 그래야지! 무려 두 달 만이잖아. 오늘은 그냥 가면 정말 삐질 거야.”
투닥거리는 사이 그들은 세미테일이 달려온 거리를 다 걸어 되돌아갔다. 정원의 한 켠에 자리한 테이블은 왕가의 품위와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레이스로 장식된 흰 테이블보가 반듯한 테이블 위엔 정원처럼 알록달록한 꽃이 한가득이었다. 3단으로 쌓아올린 은색 접시 위에 아기자기한 케이크와 과자가 거의 장식이나 다름없는 귀여운 모양새로 놓여 있다. 두 사람이 다가오는 시간을 재어 찻물을 따라놓은 시녀들이 물러나는 참이었다. 둘 뿐일 때에는 에스코트도, 허례허식 그득한 순서도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과자 접시에 손을 뻗다가 웃어버렸다.
달칵, 찻잔이 두 번째 비워졌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한 시간쯤 피었을까. 세미테일은 마카롱을 베어 물고 재잘거렸다.
“일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빨리 끝나서 다행이야! 방해는 하고 싶지 않지만 이야기 할 시간이 줄어드는 건 싫은 걸.”
“전에는 우당탕 잘만 집무실로 달려오더니?”
“피이, 저번에 엄청 고생해놓고는? 그 뒤로 안 하는 거잖아. 그 꼬장꼬장한 레자르 공작이 얼마나……. 아, 지금은 아닌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에레원은 일부러 가볍게 미소하며 쿠키를 하나 베어 물었다. 일 년을 하루처럼 사는 반신은, 아니 밀레시안들은 이따금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곤 했다.
“꽤 나이가 많았으니까. 가끔 그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아쉽기도 해. 결과적으론 내편이었으니까.”
“응? 그랬던가. 사사건건 에레원한테 반대했던 거 같은데.”
“그 사람이 제일 목소리를 크게 내줬으니까 다른 반발이 적었지. 뭐,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어. 정치니까. 그 사람 후계자는 온전히 내 편이기도 하고…….”
“아, 안드라스 말이지. 나 안드라스는 좋아해.”
“그래, 너랑 친분도 있으니까 더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닐까. 뭔가 밀어붙일 땐 그녀만한 아군이 없지.”
탈틴의 안드라스는 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레자르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탈틴의 대장으로 살아온 그녀는 그곳을 제 삶의 터전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에레원이 모르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세미테일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비웠다.
그 사이, 에레원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작의 영지는 탈틴과는 정 반대, 저 남쪽에 있었지…….
“세미테일, 혹시 저 남쪽 지방 갈 일 있어?”
“응? 왜? 뭐 부탁할 일 있어? 말만 해! 에레원 부탁이면 열 일 제치고 다녀올 테니까!”
세미테일은 당장이라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기세로 몸을 내밀었다. 시선이 느껴져, 에레원은 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심코 내비친 속내의 한자락을 따라 나머지 부분도 줄줄이 끌려나올 것 같았다.
도와줘, 세미테일. 도와줘. 내 힘이 되어줘.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에레원은 눈을 내리깔아 찻물 속에 시선을 떨궜다. 속에서 치민 것을 억누르지 않으면 눈까지 차오를지 몰라 꾸역꾸역 삼켰다. 눈을 휘어 웃자 뚜껑이 닫혔다.
“부탁은 아냐. 그 지방 차가 맛있다길래 생각나서. 지금 우리 마시는 차가 그거야. 어때?”
“아, 뭐야. 그런 거였어? 음,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특산품 같은 거야?”
“응, 매년 진상될 거야.”
에레원은 제대로 향을 음미하려 다시 차를 따르는 세미테일을 따라 찻잔에 입술을 댔다. 식어가는 온기가 미적지근했다. 향이 좋은지는, 글쎄. 사실 조금 전부터 입안에 굴러다니는 과자의 단맛마저 거슬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지만 저 안쪽, 심장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어떻게 지켜야 할 자리인데. 그 시작엔 세미테일이 있었고 그 후로 수년이다. 세미테일은 변치 않고 늘 그곳에 있었지만 점차로 더 자리를 부풀려 가는 게 있었다. 가장 소중한 이를 이용하는 것마저 가능케 했던 그것.
“……그 곳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을까?”
이 나라를, 백성을 사랑했다. 왕으로서 굽어 살피고 싶었다.
“에레원?”
에레원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응, 아냐. 뻣뻣하게 고개를 저으며 두근대는 심장을 다독였다. 양심도 없지. 어떻게, 염치도 없지. 그녀 모르게 그녀를 이용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세미테일 또한 두근대는 심장을 열심히 다독였다. 괜찮아, 에레원은 몰라. 알 리가 없지. 정말 차 얘기를 하려던 것뿐일 거야. 우연히 지역이 겹쳤을 거야. 그렇지? 세미테일은 슬쩍 눈을 굴렸다. 에레원은 비어버린 찻주전자에 데운 물을 채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아무런 기우도 발견하지 못한 세미테일은 찻잔을 비웠다. 입술을 떨지 않기 위해 가볍게 찻잔을 물었다. 조금 전 에레원이 흘린 말이 가슴에 박혀 아팠다.
너의 꿈, 너의 청사진. 그 모든 게 당장 내일이라도 끝나버릴지 모른다고 하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남쪽이라고 했다. 세미테일은 왕성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바로 전에 받았던 편지를 상기했다. 남쪽 해안가 어딘가. 내내 경계했던 일이 결국 벌어졌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다급한 글씨. 날짜는 내일이었다. 가방 깊숙이 넣어둔 종이에 새겨진 글자들이 너무나 선명히 떠올랐다. 이 세계는 왜 늘 위험에 처할까? 힘든걸. 지치는걸. 몇 번이나 구했는걸.
그러나, 세미테일은 무기를 챙겨 짐을 꾸렸다. 에레원의 세상이니까.
아무 것도 없이 이 세상에 뚝 떨어져 여신의 인도를 받던 나날은 이미 예전에 끝이 났다. 그와 동시에 얻은 게 가장 소중한 제 여왕이었다. 어린 여왕. 어른이 되기도 전에 왕부터 되어야 했던 제 소녀.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구해달라며 꿈으로 찾아온 여신을 쫓았던 그 처음과는 아주 다른 새로움이었다. 에레원을 만나고서, 세미테일은 이 세상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세상은 에레원이 사랑하는 세상이었다. 제 손 잡고 “네가 있으면 용기 낼 수 있을 것 같아.” 하던 작고 강한 소녀. 나의 여왕.
내 세상은 너야. 그러니 네가 사랑하는 백성,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 될 테야. 그것이 널 지키고 내 세상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고 누군가 물어줬으면 좋겠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몇 번이고 말하고 싶은데. 큰 소리로.
그래서 이렇게 지칠 때면 그녀가 절실했다. 지금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보러 왔다. 하지만 자고 갈 거야. 한밤중, 에레원이 잠들면 빠져나와야지. 그 정도는 괜찮잖아? 이렇게 애썼는데. 애쓰고 있는데.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그게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는데.
에레원만큼은 끝까지 몰라야 했다. 너는 지금 머리에 얹은 왕관의 무게를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많이 힘들 텐데. 그 위에 또 다른 무거운 걱정을 얹을 수는 없어. 너는 네 세상뿐만이 아니라 내 걱정도 함께 할 테니까. 문득 조금 전 던져진 책망이 떠올랐다. 이게 얼마만이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또한 거짓말이다. 진실을 감추고 있으니까. 아무리 너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톡, 자그마한 자극으로 겹쳐진 상념에 금이 갔다.
“어…… 세상에.”
분명 해가 떠 있는 맑은 하늘이었다. 조금 흐린가 싶은, 그러나 구름을 찾으려거든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러나 세미테일의 콧잔등에, 에레원의 어깨에 자잘하게 부딪는 건 분명 빗방울이었다. 체에 거르기라도 한 것처럼 잘게 부수어진 여우비였다.
“거짓말……. 이렇게 맑은데?”
“그러게…….”
저 멀리 정원 입구 쪽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우산을 받쳐 든 집사가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에레원은, 세미테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늘을 보느라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렸다. 마주친 시선으로 아쉬움이 오갔다. 같은 무게일 죄책감은 비에 가려 눈치 챌 수 없이 흐릿하다.
“……갈까?”
“응. 아까워라.”
두 사람은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니나다를까 우산을 들고 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늙은 시종장을 향해 에레원은 손을 들어올렸다. 아직은 그들만의 시간이었다. 방해는 용납할 수 없었다. 에레원은 그 손을 그대로 옆을 향해 뻗었다. 세월의 때가 지워지지 않는 어린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몸을 부풀렸다가 어여삐 휘었다. 변치 않는 손으로, 반신은 그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이 손의 주인은 제 소녀였다. 비록 많은 것을 숨겨왔고, 숨길 것이라 하더라도 그 하나만큼은 영원할 진실이었다.
두 소녀는 장난스레 씩 웃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길을 달렸다. 꾸역꾸역 삼켜 목을 졸라 뱃속에 가둬둔 고백이 자잘한 비에 부스러져 아스라이 흩어진다.
네 애정에 빌붙어 널 이용하기만 하는 나는,
과장된 웃음으로 진실을 가리고 널 속이기만 하는 나는,
거짓말쟁이야. 네가 끝까지 모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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