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게 하는 것들엔 여러 가지가 있다. 시간을 알리는 햇빛, 키를 쑥쑥 크게 한다는 떨어지는 악몽이나, 흔들어 깨우는 엄마의 거친 손길이라든가……. 있었다, 그런 것들이. 이젠 저를 찾아오지 않는 것들이. 베레니체는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밖이 왜 이리 조용해.

 

  별당 밖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자나? 그럴 리가 없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눈에 쪽지가 띈다. 8시까지 개별 조사.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

 

  마법사에게는 갑옷도, 무거운 칼이나 방패도 필요가 없다. 아드리아나가 말하길, 신체를 함께 단련한 자도 간혹 있다고는 했지만 그건 절대 저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이었다. 뼈마디를 주무르며 밖으로 나섰다. 탁해진 호수가, 재로 흔적만 남은 풀 따위가 눈에 밟혔다. 다정한 건 당신이잖아요, 로건. 그러게요. 난 내가 무섭도록 가차없는 계집애인 줄로만 알았는데.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뛰쳐나오긴 했는데, 어딜 가야 한담. 무너진 성벽이 떠올라 방향을 잡았다. 밟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2만 년을 삭아온 도시였다. 그러고도 이만치 형체를 유지하는 게 조금, 부러웠다. 발에 채인 돌멩이 하나를 던지고 놀며 걸었다. 얘, 너도 2만년을 삭아 이리 작아졌니. 사람 아닌 것은 그렇게 오래 문드러져도 이렇게 남는구나.

 

  셩벽에 다다랐다. 아, 이렇게 무너졌구나. 꽤 크네……. 이런 뿔에 받혔다간, 저나 칼리아는 당장에 허리께가 찢길지도 몰라. 베레니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상 정도야 각오한 터였지만 싫은 건 별개였다. 라브아르데를 졸라야지……. 말은 새침히 내뱉으면서도 챙기지 못해 안달인 그가 참 웃기고 귀여웠다. 8천 해를 살았다면서도 아이일까. 하기야, 열여덟이면 어른으로 쳐주는 인간들 중에서도 29살 먹은 애기가 있는 걸. 그가 힘들어보이면 타 할아버지를 졸라야지……. 빨간약 정도는 줄 거야.

 

  자칫하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 살피던 것을 그만두고 뒤돌았다. 밤에 잘 잔 것이 도움이 됐는지 몸이 한결 가뿐해. 오늘 밤에도 불러달라 청할까……. 꿈없이, 뒤척임없이 깊은 잠을. 베레니체는 정확히 기억나는 한 소절만 돌림노래처럼 흥얼거렸다. 가사도 없이 그저 콧노래처럼. 흥얼흥얼.

 

  눈을 뜨게하는 것들엔 여러 가지가 있다. 있었다.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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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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