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님의 밀레시안 첼을 빌렸습니다. 첼mk2임. 벚꽃비화술 수련포+야파완 값입니다...!(존나

 

 

 

 


  첼이 유독 톨비쉬에게 까탈스럽다는 것은 기사단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모두라는 건 그 당사자 둘을 포함한 인원이다. 처음에야 톨비쉬도 관계를 개선해보려 노력했던 것도 같은데, 관계라는 것이 한 쪽의 일방적인 노력은 되레 역효과를 불러오기 마련이니 어느 순간부터는 톨비쉬의 노력도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첼과 비슷한 방향이었다. 둘도, 그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점점 익숙해져 갔다. 톨비쉬가 황당한 광경을 목격한 것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히잉, 스칼레타아."

 

  아발론 게이트가 아닌 던바튼 어딘가의 광장이었다. 유독 밀레시안들이 옹기종기 모여 저들끼리 알아들을 얘기를 나누는 곳. 첼이 아발론에서 벨테인 조를 봐주는 게 아니면 으레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던바튼을 지나는 김에 들러보았을 뿐이다. 그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첼은 어느 여인의 품에 안겨 울먹이고 있었다.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 반신, 골드 드래곤의 감응자. 반사적으로 떠오른 그 숱한 별명들을 한 쪽으로 치우고, 톨비쉬는 잠시 그를 지켜보았다. 마침 눈에 띄는 갑옷은 뒤집어 쓴 로브가 가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시력이 좋은 편이었다. 첼은 두 눈에 그렁그렁하게 눈물까지 채워올리며 우는 척을 했다. 그래, 우는 척이었다. 황당하게도.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갈색 머리를 다섯 갈래로 땋은 여인은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무척 밀레시안다운 얼굴이라고, 톨비쉬는 은연 중에 생각했다. 첼의 자료 중에 저런 외양에 스칼레타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기는 했다. 여동생이라 했던가. 밀레시안에게 가족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첼이 저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한 정보였다. 그는 문득 자신이 첼을 감시하듯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필연처럼 첼이 그를 발견했다. 어린애 같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는 데에는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고민은 짧았다. 톨비쉬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곧 잊어버렸다. 한동안 아발론 게이트에 돌아갈 일은 없었으므로, 첼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였다.

 

  아프다 싶을 정도로 땅을 때리는 빗줄기 속에, 첼은 오도카니 서 있었다. 가뜩이나 작은 몸뚱어리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고민은 짧았다. 싫은 소리 좀 듣더라도 내버려 둘 수야 없는 노릇이다. 톨비쉬는 그에게 다가가며 목소리를 틔웠다.

 

"첼 씨!"

 

  빗줄기가 무척 거셌다. 톨비쉬는 미동조차 없는 뒷모습에 대고 몇 번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첼 씨, 뭐하십니까? 첼 씨! 좀 더 다가가자 어둑어둑한 사위와 그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손에 들린 빛나는 둔기. 톨비쉬는 뭔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확신했다. 첼은 더 견딜 수 없을 때 으레 제 정령을 꺼내들곤 했다.

 

"아무리 밀레시안이라도, 이런 날씨에 굳이 비를 맞으며 서 계실 이유는 없지 않나요?"

 

  부러 평이한 어조로 말을 걸었으나 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톨비쉬를 향해 조금 고개를 튼 것도 같았지만 빗줄기가 보여주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고민은 짧았다. 톨비쉬는 첼의 팔에 손을 가져다댔다. 가볍게 잡아 흔들 생각이었다.

 

  머리 왼편으로 정령의 빛이 날아들었다. 전장에 적을 둔 몸이 아니었다면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대지 마...!"

 

  잠깐 닿았던 손이, 팔이 다시 빗속으로 내던져졌다. 톨비쉬는 순식간에 거칠어진 호흡을 숨기며 첼을 보았다. 당황스러운 것보다도 그의 얼굴이 이제 저를 향한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곧 당황마저 잊었다.

 

  빗줄기가 거세었다. 그러나 젖은 눈동자까지 가리지는 못하는 법이다.

 

"...꺼져."

 

  톨비쉬는 잠시 지체한 뒤에 그의 축객령에 따랐다. 천천히 몸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지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엇을 깨달았나. 톨비쉬는 명상하던 버릇으로 제 충격의 원인을 찾아 침잠했다. 걸으면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애 같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는 데에는 한 순간이면 충분했었다. 잊었다는 사실마저 잊었던 일이 같은 충격으로, 몸집을 부풀려 다시 한 번 그를 때렸다. 톨비쉬는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 보려고 했으나 누군가 붙들기라도 한 것마냥 고개도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그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과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 동시에 들었다. 그 혼란에 몸이 굳은 것이다. 거기까지 제 상황을 정리한 기사는 새로 몸을 때리는 깨달음에 숨을 멈췄다.

 

  둘 중 어느 것이 제 욕심인지, 선뜻 확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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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앤 소울의 자캐를 기반으로 한 밀레시안이기 때문에 일부 설정이 블레이드 앤 소울의 막내를 따릅니다.

 

 

 

  이 에린은 제 세상이 아니다. 사난사는 무척 오랫동안 그러한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고서 밀레시안의 삶을 살았다. 그 뿐이었다면 평범한 축이었을 것이다. 밀레시안 중에도 에린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겉도는 이는 더러 있었으므로. 그러나 난사에게 제 세상이 아닌 에린이라는 표현은 그 뿐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늘 돌아가고 싶어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 한참이나 헤메었었다. 여신의 목소리에 따른 것도 언젠가 그녀가 돌려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었기 때문이다.

 

  사난사는 에린에 흘러들어오기 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갖고 있었다.

 

  모든 기억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어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이 무엇인지 곧바로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일곱 살 무렵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분질러먹은 일 따위는 누구라도 기억할 수 있다. 그녀의 기억은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여신을 구출하고 빛의 기사가 되어 용의 감응자가 되고 반신의 힘마저 얻어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라는 칭호까지 얻었지만, 그 모든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열망만이 커져갔다. 초조했다.

 

  스승님, 하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던 어린 제자들. 그 해사한 얼굴들 위로 그을음과 피가 한 바가지씩 퍼부어지는 꿈을 꾸고 소스라쳐 잠을 깨는 날들이 더러 있었다. 점차 잠을 줄이던 그녀는 제 몸이 수면이나 섭식 없이도 멀쩡하게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먹고 잠들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길을 찾아봐도 여전히 제자리였다. 여신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실감해버리고 만 것이다. 제 두 발이 이 에린 땅에 못박혀 있음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아주 처절하게.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라는 칭호와 반신의 힘,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버린 여신과 제게 죽음을 요구하던 드루이드의 마지막 말이 그녀를 얽어매고 있었다. 깨달은 것은 추락하던 그 때였다. 그녀와 검을 얽던 사내의 결말이었다. 나란히 추락했으나 땅에 내려선 것은 그녀뿐. 옆의 사람들도 잊고서, 난사는 무릎을 꿇었다. 보랏빛을 띈 검은 꽃줄기 환상이 그녀를 휘감아 땅에 파묻었다. , 난사는 울음처럼 웃었다. 절망만 안겨주던 세계에 정을 붙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다, 그들이 왔다.

 

  이름만 들어왔던 절대신을 따르는 자들이라 했다. 정갈하고 엄격한 기사들이었다. 다만 앳된 얼굴의 소년은 그녀를 찬양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만한 일을, 정말 그녀가 했던가? 부풀려졌을 것이 틀림 없는 그 이야기에, 난사는 도리어 겁을 집어먹었다. 제게 기대를 거는 수 쌍의 눈동자를 피하고만 싶었다. 따스하게 건네어지는 말씨마저 의심스러워, 오히려 저를 의심하던 여기사가 차라리 마음 편했다. 그들도 제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마 하고 대답하는 것은 이제 타성이었다.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금발을 지닌 기사는 그런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할일이나 주었으면 했다. 움직이지도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금이 간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다. 자칫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기사의 말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렇게 부수어지면,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이 지긋지긋한 삶도 끝나지 않을까. 이제라도 제자들 곁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샘솟았다. 저 하나만으로 끝날 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에린은 또다시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제 안의 반신이 어떤 변수일지 알 수 없었으므로 죽어서는 안된다 했다.

 

  회한의 동굴로 향하는 발걸음은 느리고 무거웠다. 이 균열을 독이라 했던가. 난사는 그녀를 어떻게든 북돋워보려던 소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산을 올랐다. 동굴 앞에는 뭔가 반짝이는 것들이 한가득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어느것도 난사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난사는 홀린 듯이 걸어 검게 입을 벌린 구멍으로 발을 내딛었다. 깊게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사부님!"

 

  어린 여자 아이였다. 검은 머리 양갈래로 곱게 묶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눈물 탓일까, 아니면 그녀의 기억이 많이 흐려진 탓일까.

 

"언제 오세요?"

"……곧 간단다."

 

  와아! 외마디 탄성과 함께 아이는 사라졌다. 난사는 사방으로 고개를 휘돌렸다. 산발한 머리채가 사방으로 날렸다. 어디, 어디에 있니. 크게 불러보려 숨을 들이키고 나서야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내 어찌 네 이름을 잊었단 말이냐.

 

  이미 금이 가 있는 그릇은 밀려 넘어지자 산산이 부서저 깨졌다. 균열은 그 자체로 독이 아니다. 그 갈라진 틈으로 독이 새어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지.

 

  깨진 그릇에서 독이 흘러넘친다.

 

  등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었다. 등을,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 땅에 피웅덩이가 고인다. 제 손발이 끝부터 탁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난사는 기껍게 내려다보았다.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무언가 끝이 났다. 오직 그것만을 알았다. 동굴이 내려앉은 잔해에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햇빛을 가렸다.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 사난사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처음? 아니다. 난사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발 아래 더운 김 피어오르는 웅덩이가 찰박였다.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가 방해된다 생각하던 차에 바람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난사는 무언가 제 등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시야 끝에 노란 것이 스치운다. 난사는 고개를 돌렸다. 날개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제 등에 뿌리를 내리고 돋아나 있었다. 손을 뻗어 더듬어보았다. 이제 막 돋아나 피를 흠뻑 뒤집어 쓴 날개는 흙먼지를 갈라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문득, 어떠한 예감에 전율이 일었다.

 

"사난……!"

"……! ……까이 가지……!"

 

  이젠 목소리의 주인이 잘 보인다. 난사는 두 남녀를 잠시 바라만 보았다. 역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기야, 내 아이들의 이름도 잊었는데 당신들 이름이 기억날 리가 없지. 난사는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등에서 흐르는 피는 멎을 줄을 모른다. 피로 된 연못은 커지기만 했다.

 

"……, 이게…… …… 도대……!"

"……!"

"……!"

 

  하얗게 질린 소년이 자꾸만 무언가를 외쳐댔으나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소한 문제였다. 난사는 귀를 닫고 날개를 펼쳤다. 다시금 전율이 인다. 태어날 때부터 달고 있었던 것 같다.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말로 다 못할 해방감이었다. 발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은 피가 아니라 저를 이 땅에 묶던 검은 덩쿨이다. 난사는 크게 한 번 날갯짓을 했다. 몸이 솟구친다. 아니, 떨어진다.

 

  사난사는 하늘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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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조님이 썰 같이 풀어줌 시연님이 카즈피네 던져줌 0 0)9

 

 

 

  시체에서 솟아나는 제바흐와는 달리 기르가쉬는 스스로의 몸을 이계의 신에게 바친 산 사람들이 화한 모습이다. 피네는 그 참담한 모습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측은한 것과 별개로 그녀의, 그녀 신의 적이었다. 그런 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르가쉬나 제바흐 같은 이계신에 의한 괴물들은 보는 것조차 괴로웠었다. 마음이 전부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환청 같은 것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피네는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뒤늦게 등 뒤에 있을 조원들이 떠올랐다. 저 두 명은 지금 그 누구보다 저를 의지하고 있을 터다.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표정을 가다듬고 뒤로 돌았다. 지친, 그러나 사명감에 가득 찬 두 쌍의 눈이 저를 의지한다. 그 눈들은 동시에 그녀 어깨 너머에 자리한 그들의 적 또한 보고 있다. 피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자. 잘 될 거야."

 

  그것은 축사와도 같은 응원이다. 피네는 작전에 임하기 전이면 늘 몇 마디 말로 조원들을 북돋우곤 했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잘 되게 할 것이라는 다짐. 그녀의 조원들은 그녀처럼 상냥한 이들 뿐이었다. 마주 웃고는 미리 짜여진 작전대로 제 위치로 향한다. 이제는 그들의 뒷모습이 눈에 담긴다. 가슴의 응어리가 해소되고서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불쑥불쑥 눈앞에 모습을 들이밀었다. 이제는 선명한 색으로 기억될 것들. 피네는 그 모습을 되새기고 옆을 돌아보았다.

 

"가자, 카즈윈."

"그래."

 

  인원이 부족한 탓이다. 둘 이상의 기르가쉬가 등장하는 것은 상정한 범위 내의 돌발상황이었지만, 아르후안 조가 아발론 게이트에 발이 묶인 시국에 두 개의 조를 한 전투에 투입할 여력은 없었다. 견습기사들로 이루어진 지원부대가 오기를 바라기도 힘든 상황에 난전까지 각오했을 때, 카즈윈이 나타났다. 혼자였다. 별다른 말은 않았지만 헤루인의 조원들에게는 또다시 예의 그 온갖 상황을 가정한 빽빽한 지령서를 던져주고 왔을 터다.

 

  피네는 문득 생각난것처럼 작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아튼 시미니께 기도한 줄 알았지 뭐야."

"뭐?"

"카즈윈이 와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터무니없는 예감인 줄 알았는데, 기도였나 하고."

 

  그가 제 옆얼굴을 보는 것을 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것도 같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전이 코앞이으므로. 말은 더 필요 없었다. 피네가 완드를 들어올린 것과 동시에 카즈윈이 땅을 박찼다. 그것이 신호였다. 약속된 곳에서 두 사람의 신성력이 발현되고, 괴물의 울음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진흙에 파묻힌 울음소리.

 

 

 

  적의 빈틈을 공격할 검은 둘인데, 정작 그 빈틈을 만들 방패와 사슬이 하나뿐이었다. 선택지라고는 속도전밖에 없다. 각자 역할을 잘 알고 있는데다 피네와 그 조원들의 호흡은 말할 것도 없었고, 카즈윈 또한 그들에게 맞추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으므로 돌발상황만 잘 대처한다면 큰 피해 없이 끝날 싸움이었다. 저 괴물들의 뒤엔 이제 선지자도 없었으므로.

 

  그러나 대처 못할 상황이라는 건 생기기 마련이었다. 휘두른 검을 거둬들이는 조원의 머리를 향해 기르가쉬의 칼이 날아들었다. 피네는 완드를 뻗었다. 푸른 번개가 내리꽂힌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제 오른쪽 사각에서 날아드는 다른 하나의 손톱을 보지 못했다.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너무 가까웠다. 왼손의 방패가 너무 멀다. 이건 맞는다고, 머리가 아닌 몸이 예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세상이 뒤집혔다.

 

  피네의 날아간 머리는 땅을 한바퀴 굴러 진흙을 한 움큼 집어먹었다. 뱉어내고나서, 피네는 제 머리가 무사히 목에 붙어있는 것을 알았다. 고통도 머리를 맞은 충격이 아니라 땅에 구른 충격으로 인한 것 뿐이다. 어째서?

 

"피네!"

 

  급작스러운 의문과는 달리 눈은 착실히 전장상황을 보고 있었다. 카즈윈이 뭘 원하고 제 이름을 불렀는지, 피네는 마치 본능처럼 깨달았다. 높이 쳐든 완드, 뿜어낸 신성력이 만들어낸 방패가 다시 한 번 내리꽂히는 기르가쉬의 손톱을 튕겨냈다. 몇 번이고 있던 기회였다. 반짝이는 사슬이 괴물을 묶은 것과 동시에 거대한 검이 그를 향해 내리꽂혔다. 의도된 바대로 남은 또 하나의 기르가쉬도 검 끝이 닿는 곳에 서 있는데, 그 건너편에서 또 하나의 검이 솟았다. 마저 내리꽂혔다.

 

  그 두 번의 지진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괴물은 오간 데가 없고 추락한 진흙투성이 시체가 두 구. 거대한 언덕같은 그 형상도 곧 먼지로 스러질 터다. 끝난 것이 분명한데도 알 수 없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게 뭘까. 불안할 땐 그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러나 카즈윈을 찾기도 전에 걱정스러운 외침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조장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마지막엔 좀 위험했지."

"하지만 피가……!"

 

  피. 피네는 이제 습관이나 다름 없는 웃는 얼굴도 유지하지 못하고 홱 뒤로 돌았다. 높이 올려 묶은 제 머리채가 시야 끝을 스쳤다. 알던 색이 아니다. 피다.

 

"카즈윈!"

 

  그는 꿇어앉아 있었다. 고개 숙인 옆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자잘한 생채기, 그 옆에 떨어뜨린 것처럼 널부러진 검 두 자루를 알아보았다. 허리께를 감싸쥔 손. 피. 그의 푸른 옷은 이미 붉다 못해 검었다. 바지까지 검게 물들어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에게 가는 열 몇 걸음이 세상 어느 길보다 멀었다.

 

"괜찮아."

"이게 어디가 괜찮아!"

 

  피네는 건틀렛을 벗어 내던졌다. 어깨의 갑옷과 벨트를 끌르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제 갑옷을 입고 벗는 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그런데도 자꾸만 손이 헛짓을 했다. 억울한 마음에 치미는 것을 애써 삼키는데 덥썩 손을 잡혔다. 피 묻은 손이다.

 

"피네."

 

  얼굴에 맺힌 땀이 전투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벌써부터 쇼크가 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 그의 얼굴 이곳저곳을 헤메며 다른 징후를 찾는 두 녹색 눈동자를, 카즈윈은 한 번 더 불러세웠다. 겨우 그를 보게 되었다.

 

"피네."

"……응."

"천천히 해. 괜찮아."

"……카……."

"괜찮아."

 

  마침 도착한 다른 조원이 붕대를 내밀었다. 피네는 그 붕대를 받아들고서야 덜덜 떨던 손을 진정시켰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조장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 피에 놀라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피네는 제 손을 아직 놓지 않은 카즈윈의 손을 꾹 쥐었다. 때를 기다리던 조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여관이라도 잡아야 할까요?"

"……아니. 민가는 소문이 퍼지기 쉬워. 라이미라크 교단으로 가줘. 도와줄 거야."

 

  두 조원 모두 마을로 떠났다. 한 사람은 교단으로, 다른 한 사람은 모자랄 게 분명한 구급물품을 사오겠다 했다. 막 전투를 치른 뒤에 쓸데없는 접촉은 피하는 게 옳다고, 피네 스스로도 생각은 했지만 무시했다. 격한 전투 끝에 남은 마나도 얼마 없어 크게 회복마법을 걸기도 여의치 않았다.

 

  카즈윈은 앉은 채였다. 허리에 붕대를 감으려면 그 편이 나았다. 갑옷은 이미 벗었지만 셔츠는 아직이었다. 손을 떼는 순간 피가 뿜어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단추를 끌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피네는 말도 없이 손을 뻗었다. 조금 전엔 제 손을 잡았던 손을 잡아 만류하고 칼을 들었다. 어차피 입지도 못할 옷이니 자르는 게 나았다. 그의 손이 알고 있던 것보다 차가운 건 곧 밤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을 다잡았다.

 

"……할게. 준비 됐어?"

"그래."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다. 굳이 들려주는 대답이 손을 잡아 누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피네는 세 번 접은 깨끗한 천을 들어 그가 막고 있는 왼손 가까이에 댔다. 속삭이듯이 하나, 둘. 셋까지는 필요 없었다. 가장 적은 피를 흘리며 가장 어려운 작업이 끝났다. 피네는 붉은 점이 나타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붕대를 펼쳐들었다.

 

"감을게."

"응."

 

  나타나기 시작한 붉은 점들 위에 다시 흰 붕대를 감는다. 허리에 붕대를 감는데 혼자 하려니 숫제 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한 바퀴 돌려 감는데 그의 어깨에 볼이 스쳤다. 축축한데다 뜨겁다. 전투 후의 열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소문이고 뭐고 의사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카즈윈, 솔직히 말해. 어지러워?"

"……조금은."

"사제들이 빨리 와줘야 할 텐데."

 

  처치를 끝내고 피네는 두 손을 모았다. 남은 마나로는 한 번... 전부 끌어모아 세 번이 전부였다. 피네는 반짝이는 빛을 붕대 위에 끼얹고 나서야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진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지났지……. 더 늦으려나."

"곧 오겠지."

"하하, 응……. 그렇겠지……."

 

  겨우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눈물이 없을 뿐 울음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조원 중 누구, 아니 다른 누구라도 좋았다. 한 사람만 더 옆에 있어준다면 괜찮았을 텐데. 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된다던 그의 말이 이럴 때 생각나서는 안되는 건데.

 

  까슬한 손이 무릎 위 제 손에 얹혔다. 이미 밤이 내려 까만 세상에 그의 회색눈이 선명한 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제 마음에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스스로도 참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다. 그는 그녀의 구원이다. 큰 것이던 작은 것이던, 그는 늘 그녀를 진흙탕에서 빼내어온다. 피네는 카즈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플까 두려워 차마 끌어안지는 못하고 주먹 쥔 손으로 끌어안았다. 매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즈윈은 피 말라붙은 손을 피네의 등에 얹었다. 그녀의 조원들이 조금만 더 늦기를 바랐다. 피네가 조금이라도 더 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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