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동정컨대

마비노기 2015. 11. 27. 01:40

15.10.15 연성, 타르라크+밀레시안(주밀레)

 

 

 

"당신이라면 빛의 기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이 팔로 검이나 들 수 있을까요."


  가멧은 작게 실소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제 키만한 스태프를 들려면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쥐어야 겨우 가능한 근력이다. 갑옷이라니, 입고 숨이나 쉴 수 있을까.


"걸을 수나 있으면 다행이겠어요."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창백한 낯에 확신을 담아 끄덕였다. 시드 스넷타, 웬만한 사람은 발조차 들일 수 없는 봉인의 땅. 쌓인 눈의 두께는 얇아지는 일 없이 두꺼워지기만 했다. 인간에게는 너무나 추운 곳이다. 가멧은 다음에 찾아올 때에는 두터운 새 로브를 하나 마련해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더 바빠지시겠군요."
"예... 또 한참 시간이 지나야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절 잊기 전에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노력하겠습니다. 그 얘기 말입니다만, 다음에 오실 때 좀 더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겠습니다. 좀 더 실험해보지요. 다른 밀레시안들에게서도 사례를 모아보겠습니다."


  타르라크는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멧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제 의문에 그가 동참해준 것이니 감사는 그녀가 해야 할 것이다. 종종 마나허브를 선물하려 찾길 잘했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들었다. 다시 한 번 여신의 계시를 받고 그에 따르기 전, 잠시 들른 아이라가 저를 아주 잊어버린 것이 그렇게 서글펐었다. 가멧은 가방을 열어 마나 허브를 한 묶음 꺼냈다.


"매번 정말... 감사합니다."
"잊지 말아달라는 뇌물이에요. 너무 부담갖지 말아요."


  면구한지 머뭇거리는 그의 손을 잡아 올려 쥐여주었다. 한 번 꾹 잡아주었다. 제 손도 찬 편이지만 만년설에 파묻혀 사는 드루이드의 손은 그의 창백한 낯보다도 차갑다. 가멧은 제 손이 충분히 따뜻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문득 서러워졌다.


"그럼, 또 봬요."
"힘내십시오, 가멧 씨."


  손을 놓는다.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쓰며 단상을 내렸다. 말 위에 올라 한 번 뒤돌아 보았다. 하얀 설원, 까만 제단. 그 중심에 드루이드 하나. 파리한 낯과 서늘한 시선으로 저를 배웅하는. 전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장면이 아닌가. 그러나 이토록 차가운 곳에 홀로 갇혀 느낄 외로움에 가멧은 감히 공감했다. 잉크자국으로 남을 전설보다야 따뜻하게 손닿을 수 있는 현실이 더 나은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다.


  가멧은 가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돌려세웠다. 그녀 대신 말이 걸어줄 것이다. 서투른 솜씨로 말 옆구리에 발을 한 번 굴렀다.  그녀를 태운 말이 내딛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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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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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 내린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같게 만든다. 손안에 남지도 않을 잿더미가 산처럼 생겨나는 중이었다. 과거로부터 쌓인 무수한 전투의 흉도, 채 닳지도 않은 일 년여 전의 흉도 같은 재가 되었다. 비통함에 젖어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어느 왕자의 고민이었던 것을, 가멧은 기억해내곤 곧 잊었다.

 

"제가 막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늘 반쯤 잠겨 있었다. 어떻게 틔워도 결코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기사단 내에서도 그녀가 내놓는 의견은 늘 중하게 다루어졌다. 이유는 여러 개였다. 과거의 숱한 행적과 그것을 수행했던 능력, 한 사람 당 한 가지밖에 쓸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신성스킬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점, 무엇보다 결사단으로서 같은 사명을 수행한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그녀가 내놓은 의견이 가진 무게는 그러한 이유에 근거하고 있지 않았다. 견습기사들은 이미 대피를 마쳤다. 방어선을 구축하던 정기사들, 조장들의 주의가 한 순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톨비쉬. 어서."

 

  네 전투조의 조장들은 사실 대등한 입장이다. 그러나 일전 결사단으로서 이례적인 활동을 전개했을 때의 기억은 그녀를 자연스레 톨비쉬에게로 이끌었다. 그가 납득한다면 다들 따라줄 것이다. 가멧은 당장이라도 미쳤냐고 소리칠 것 같은 아벨린이나 이미 달려오고 있는 알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는 피네를 외면했다.

 

  톨비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 늘 걸려있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가멧은 그를 믿었다. 톨비쉬라면 제 말의 합리성을 알아줄 것이다. 그는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곧 영영 굳어있을 것만 같던 입술이 열려 숨을 들이켰다.

 

"……알겠습니다, 가멧 씨."

"톨비쉬! 저 말을 들어줄 생각인가요!"

"한시가 급합니다, 아벨린. 이의는 받지―"

"지금 죽겠다는 말을 하잖아요! 저 말을 정말 들어줄 생각이냐고 물었어요, 톨비쉬!"

 

  피네가 말을 얹으려 다가왔으나 카즈윈이 가로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는 피네에게 고개를 젓고, 그는 가멧을 보았다. 가멧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즈윈은 아마 그녀가 말을 내어놓기도 전부터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예민함과 판단력은 늘 믿음직스러웠다. 가멧은 톨비쉬도 같은 것을 말해주리라 믿었다. 카즈윈은 아벨린의 분노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가멧은 밀레시안이야. 죽지 않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지금?"

"아벨린. 이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그녀의 판단이 옳아요. 각 조장은 조원들과 함께 신속하게 물러서세요."

 

  다만 한 가지는 그녀의 믿음과 어긋났다.

 

"최전방은 저와 가멧 씨가 맡습니다. 움직이십시오!"

 

  가멧은 착잡하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실은 믿음이 아니라 희망사항이었다. 그가 남겠다 말할 것을 알았기에 더더욱 그 반대로 말해주길 바랐고, 그렇게 믿었다. 시간이 없었다. 험난한 전투를 계속해 온 사람들답게 당황한 이 하나 없이 빠르게 언덕 위로 빠져나가는 인파를 거슬러, 가멧은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다리로 향하는 그를 따라잡았다.

 

"톨비쉬."

"이전처럼 해볼까요. 적당히 때를 보아 빠져나가야 하니, 작전의 변경은 조금 필요하겠군요."

"톨비쉬!"

 

  가멧은 그의 앞으로 뛰쳐들었다. 열기와 굉음을 등지고 서서 그를 밀어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스태프는 가느다란 팔에 비해 늘 너무 무거워보였다. 그 쇳덩이를, 파리한 손에 핏줄이 돋아나도록 힘주어 잡아 단호하게 앞으로 내민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설득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톨비쉬는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남는 건 고집 뿐이다.

 

"당신도요. 어서."

"……일전에 약속드렸지요, 가멧 씨. 당신을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고. 제가."

 

  가멧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서슬에 기사의 맹세는 미처 다 되풀이되지 못했고, 그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 마지막까지 말했어야 했다.

 

"부탁입니다. 한시가 급하다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가멧……."

"가요."

 

  그녀는 정말 그를 밀어낼 기세였다. 톨비쉬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볼 때마다 실감하는 것은 그녀의 왜소함이다. 가녀린 종류가 아니라 땅에 떨어져 말라가는 나뭇가지의 앙상함이었다. 눈 아래 더께로 쌓인 피로가 그런 인상에 크게 한몫을 했다. 초췌한 얼굴로 단호한 표정을 지어봤자 안쓰럽기만 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의 앞에 버티고 선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무어라 말해야 당신이 나를.

 

"제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곁에 두려 할까. 그 소망은 다음 순간 메아리 친 절규에 찢겨 산산조각 났다.

 

"여기 남는 게 날 혼자 두는 일이 될 거라는 걸 왜 몰라요!"

 

  그 처절함에 시곗바늘마저 찢겼다. 톨비쉬는 그녀가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알고 지낸 기간보다 보고서를 통한 기록으로 더 오래 그녀를 알아왔다. 가멧은 그 모든 기록에서 지인의 죽음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동반자라 할 수 있을 모래라는 이름의 용은 기사단조차 본 일이 적다. 위험해질 것이 두렵다며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기 일수였다. 가멧은 지금 제 용을 숨기듯이 알반 기사단을, 톨비쉬를 등 뒤에 숨긴 것이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가멧은 오른손을 뻗었다. 겨우살이마냥 가느다란 손가락이 한 번, 망설이더니 톨비쉬의 얼굴에 닿았다. 뺨을 감싼다. 서늘한 엄지가 제 눈가를 어루만졌을 때, 톨비쉬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시야를 꽉 채운 미안한 얼굴이 외려 더 상처였다. 다시 한 번 굉음이 계곡을 흔들자, 그녀는 손을 미끄러뜨렸다. 톨비쉬는 그녀의 손가락이 제 귓볼을, 턱을, 목을 지나 마침내 흉갑에 안착했을 때 어렴풋한 쇳내를 맡았다. 죽음의 냄새. 아픈 것을 그리도 못 견디는 사람인데 오늘은, 몇 번이나 죽을까.

 

  가볍게 밀치는 그녀 손에 쉽게 떠밀려 물러선 것은 필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톨비쉬는 젖은 눈이, 메마른 입술이 제발, 하고 속삭이는 것을 눈으로 들었다. 그 말에 떠밀려 한 걸음 더 물러서며 동시에 깨닫는다.

 

  당신은 늘 이런 식으로 혼자 남았군요. 전부 등 뒤로 돌리고, 이렇게 홀로 남았어.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에 결국 쏟아진 눈물이 그녀의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별개로 감정을 읽기 참 쉬운 사람이었다.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미안해하는 그녀를, 조금 다른 의미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톨비쉬는 저가 먼저 뒷모습을 보여야 그녀가 안심할 것을 알았다. 안심한 채로 싸워야 조금이라도…….

 

  덜 죽을 게 아닌가. 저도 모르게 만들고 만 문장을 애써 잊으며, 기사는 돌을 밟았다. 본격적으로 계곡을 때리기 시작한 굉음이 한없이 멀었다.

 

 

 

 

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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