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쉬x시연님의 주밀레 첼입니다. 6천자 이상 사양! 일부 공개합니다.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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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첼은 오랜만에 다시 수원지에 발을 디뎠다. 그 일주일 간 눈앞의 절벽 틈을 찾아온 적은 없었다. 별 의미를 둔 부재는 아니었다. 제 수하에 있는 견습 기사들에게는 나란히 닷새짜리 임무를 쥐여 내보낸 터라 그간 하릴없이 기다리기 싫어 그랬을 뿐이었다. 그러다 하루나 이틀쯤 늦을 수도 있는 일이지. 밀레시안에겐 사실 시간의 흐름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 일주일 간 첼은 평소보다 짜증스러웠으나 그 미묘한 변화를 유일하게 알아챈 그의 정령은 입이 무거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첼의 짜증은 그 스스로까지 포함해 아무도 모르는 것이 되었다.
자칫 그대로 제 할 일을 하느라 일주일은 더 흘려보냈을 첼을 도로 불러들인 건 조원들의 보고서를 빙자한 편지였다. 아무래도 사흘 이상 자리를 비울 땐 중간보고라는 것이 필요했다. 비밀스런 방법으로 첼에게 흘러들어온 편지는 꼭 세 통이었다. 그들은 편지에도 꼭 저들 같은 말들을 써놓았더랬다. 형식이고 예의고 아무것도 없이 제 감상만을 휘갈겨 쓰는 디이와 보고할 내용, 그리고 보고사항 외엔 단정하게 한두 줄로 절제된 의견을 덧붙이는 카오르가 가장 절친한 사이라는 건 몇 번을 곱씹어도 재미있었다. 픽픽 웃으며 그 둘의 편지를 넘기고 나면 로간의 차례였다. 첼은 그와 관계한 후로 이따금 서면으로도 느껴지는 그의 애정이 부담스러워 종종 그의 보고서만은 제대로 읽지 않은 채 가방 속에 던져두고는 했다. 오늘도 그의 가방에 대충 던져 넣어진 편지 중 한 통은 구겨져만 있을 뿐 처음 그의 손에 들어왔을 때처럼 밀봉된 채였다.
그 편지들은 함부로 처분해서는 안 되는 물건들이었다. 첼은 늘 슈안이나 다른 조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 편지들을 태웠다. 기사단의 규칙이 첼에게까지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야 허다했지만 그렇게 해줘야 깔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몇 장의 종이가 재로 날리는 걸 지켜보며 시기를 가늠했다. 무엇을 위한 시기인지는 그만이 알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에 눈이 부셔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첼은 감상에 빠지는 대신 편지부터 떠올렸다. 이미 결재는 이틀쯤 미뤄졌으니 임무 확인이야 조금 나중에 해줘도 좋을 터다. 어차피 훈련도 봐줘야 하니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태우는 게 나을 성 싶었다. 그러나 게이트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런 생각은 싸그리 날아갔다. 첼을 돌아보는 로간 옆에 예상도 못한 뒷모습이 눈에 박혔다. 이후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조장님!”
첼은 한순간 그대로 뒤돌아 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를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오늘처럼 싫었던 기억은 없었다. 로간의 들뜬 목소리에 첼의 존재를 깨달은 뒷모습이 훌쩍 뒤로 돌았다.
그래, 저 시리도록 파란 눈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첼 씨.”
첼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아,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물며 모자챙을 잡아 눌렀다. 나란히 선 저 둘을 보자마자 난감하게도 그 날 아침의 착각이 떠올랐다. 첼은 걸음을 내딛으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거짓말은 익숙하다. 말을 꾸며내는 것과 태도를 꾸며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의 가장된 태연함은 자연스러웠지만 사실 그의 거짓말이 무척 꿰뚫어보기에 쉬운 종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단 한 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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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같은 남자다. 설명할, 혹은 속일 필요가 없는 건 수월해서 좋았지만 난감함은 몇 배나 커져 있었다. 첼은 손을 들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써 눈가를, 그렇게 표정을 가려 속내를 숨기는 건 그의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모자챙에 손이 닿았다.
그의 손에 닿은 게 모자 말고도 더 있었다. 툭, 잘 닦인 돌바닥에 첼의 가장 단단한 방호벽이 떨어졌다. 첼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의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그 열기인지 냉기인지 모를 것에 얼굴 안쪽, 피부 한 꺼풀 아래층이 훅 달궈졌다.
첼은 그제야 저를 온종일 긴장시키던 감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본능처럼 울리는 경종이었다. 저 눈에서 놓여날 수가 없다. 달리 말하면 저 눈이 쫓는 것은 저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첼 씨. 이 이상 걱정시키지는 마세요.”
“……나 원.”
첼은 잡힌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으나 그 명백한 의사 표시는 무시당했다. 톨비쉬는 오히려 잡은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허리를 숙였다. 들이쉬고 내쉬는 서로의 호흡 한 줌이 느껴질 만큼 얼굴이 가까웠다. 차가운 새벽공기와는 다른 미적지근한 온기였다. 첼은 입 안으로도 번지려는 톨비쉬의 체취를 피해 부러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그 시퍼런 눈을 보지 않아도 자연스러울 거리라는 그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