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조님(@giggl_eli)님의 신청으로 톨비밀레 작업했습니다. 신청 감사합니다!
1은 부분, 2는 전문 공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늦은 밤, 어느 방 안에 불씨가 하나 살아 있었다. 무척 오랫동안, 꺼지지 않고 타오르던 불씨다. 작은 촛대 두엇이 밝히는 공간은 책상 위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책상 앞에 앉은 남자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타는 빛이 그의 눈동자에 일렁였다. 그의 손에는 펜이 쥐여 있었고 그 앞에는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 어둠속에 한참이나 석상처럼 앉아있던 남자는 드디어 손을 들었다. 펜을 잡은 손이 글씨를 써내리기 시작했다. 막힘없는 달필이었다.
안녕하세요, 클로드 씨. 서면으로는 아주 오랜만에 찾아뵙지요. 아니, 이런 사적인 편지는 보낸 적이 없으니 오랜만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겠군요. 어차피 받아보지 못하실 편지라는 걸 감안하면 사실 이런 인사치레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겠습니다만, 당신을 생각하며 쓰는 글이니…….
클로드는 두 손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배정받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불 한 번 피운 적 없는 방안의 공기는 찼다. 때문에 그의 손발은 조금 식어있었다. 의식하는 건 아니었지만 주로 수리검이나 검 따위의, 날 선 무기를 주로 쓰느니만큼 그는 손발의 감각이 둔해지는 걸 꺼렸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창가로 향했다.
투둑, 투두둑.
특별조가 반쯤 어거지로 보수한 창틀은 잘 닫히지도 않았다. 클로드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빗방울이 다 튀어 들어오는 창틈을 메웠다. 그 잠깐 동안 내쉰 숨에 창문에 뽀얗게 김이 서렸다. 불도 잘 피우지 않아,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비와 하늘을 뒤덮은 구름 때문에 오전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은 무척 어두웠다.
흐린 빛이 소년의 얼굴을 아스라이 비췄다. 뿌연 공터, 저 멀리 꿈처럼 절벽이 떠 있다.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절벽 틈, 이공간이 아닐까 싶으리만치 비밀스러운 장소에 몸을 의탁하다보니 종종 넋을 빼게 되는 풍경을 보는 경우가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물안개로 부서지는 빗줄기 어딘가를 헤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덜컥 흔들렸다. 조금 전 발견한 것을 부정하듯이 눈을 수차례 빠르게 깜빡이던 그는 서둘러 소매로 창을 문질렀다. 코를 뭉갤 듯 얼굴을 들이밀고 확인해보아도 그가 발견한 게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클로드는 방안을 홱 둘러보았으나 침구 하나 들여놓지 않은 방안에 우산 따위가 갑자기 생겨날 리 만무했다. 잠시 사고가 얼어붙은 사이, 방문이 소리를 내었다. 똑똑.
……똑똑똑.
“크흠, 클로드씨. 접니다만.”
클로드는 퍼뜩 놀랐다. 그 잠깐 사이 넋을 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달리다시피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소리, 물기와 함께 사내 하나가 쏟아져 들어왔다. 클로드는 얼른 방문을 닫았다. 빗소리는 사그라지는데 그 빈자리를 메우듯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는 종종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으리만치 정확한 타이밍에 나타나곤 했다. 톨비쉬는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머쓱한 듯 웃었다.
“놀라셨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 아뇨. 아니에요.”
클로드는 대화를 주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태도는 방의 주인일 때도 변하지 않아서, 톨비쉬는 그러고도 또 잠시 쫄딱 젖은 채로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그는 결국 먼저 청하기로 했다.
“혹시 수건은 없을까요?”
“아, 네…….”
퍼뜩 놀란 그는 드물게도 허둥대며 방구석으로 향했다. 타고난 성정이 침착한 그가 허둥댄다고 해봐야 주춤하는 기색이 비칠 뿐이었다. 톨비쉬는 원래 걸렸을 시간의 배가 지난 후에야 건네어진 수건을 받아들며 아무 내색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휴, 거듭 죄송하지만, 잠시 갑옷을 좀 벗어놔도 될까요. 말려야 해서.”
“네.”
클로드는 서둘러 벽난로로 향했다. 잠시 안쪽을 살피더니 난감한 기색이었다. 배정받은 후 한 번도 쓴 적이 없어 난로나 굴뚝에 먼지가 가득했다. 이대로 불을 피웠다간 방안에 연기만 자욱해질 건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클로드는 창밖과 벽난로를 몇 번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톨비쉬는 아무 말도 않고 그 모든 과정을 보고 있었다.
“클로드 씨, 불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하루 종일 내릴 비는 아니니 갑옷은 비가 그치면 말리도록 하죠. 음,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하하, 좀 도와주세요. 쫄딱 젖어서 혼자서는 좀 힘드네요.”
톨비쉬는 건틀렛의 가죽끈을 풀어냈다. 팔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브를 조여 맨 가죽 끈을 풀어내는 일은 좀 버거웠다. 허리를 숙여 일한 탓에 앞머리가 다시 이마 아래 눈썹까지 들러붙어, 그는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며 다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다 슬쩍 올려다본 곳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소년이 다가올 듯 말 듯 주저하며 서 있었다. 그는 조금 들뜬 마음을 다독였다.
“도와주시겠어요?”
“……네.”
“여기, 팔 아래쪽 좀 부탁드립니다. 가죽이 물을 먹어서 영 혼자서는 힘들 것 같군요.”
팔과 다리를 벗어내고 한결 홀가분해진 그는 클로드에게 오른편을 보였다. 톨비쉬의 갑옷은 건틀렛과 그리브를 제하면 흉갑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약식이었다. 그 철판을 고정하는 가죽끈이 양편에 두 개씩이었다. 클로드는 주저하며 톨비쉬를 올려다봤다. 그는 가만히 웃으며 마주볼 뿐이었다. 이윽고 소년은 손을 들었다. 푹 젖은 가죽 벨트에 손이 닿기까지 꼭 두 번 멈칫했다. 잔뜩 물을 먹은 가죽끈을 풀어내며, 소년은 끈을 뜯어버리거나 하지 않을까 더 주의를 기울였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벨트 두 개가 풀려났다. 톨비쉬는 몸을 뒤로 물리며 흉갑의 틈을 벌려 한 번에 벗어냈다. 클로드는 톨비쉬가 사양할세라 얼른 그것을 받아들었다. 함께 들었는데도 상당한 무게였다. 뒤집어 세운 그리브와 건틀렛 옆에 나란히 펼쳐 세우자 방 한 켠에 물웅덩이가 두 개째 생겨났다.
최초의 물웅덩이에서 겨우 벗어난 톨비쉬는 어깨와 상완을 감싼 철판들도 떼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주저하는가 싶던 클로드는 머뭇거리며 다가섰다. 톨비쉬는 이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더 도와주시겠어요? 저야 감사한 일이죠.”
클로드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다시 망설였다. 어깨와 팔꿈치, 허리 부분이 남아있었지만 톨비쉬는 끊임없이 손을, 팔을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남은 건 허리뿐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클로드의 시선이 도움을 청하듯 톨비쉬의 얼굴로 향했지만, 그는 팔꿈치의 벨트를 푸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허리가 텅 비어 있었다. 필요한 높이보다 더 올라간 양 팔을 보며, 클로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난감했다.
그러나 도와주겠다 해놓고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톨비쉬에 비하면 한참 작은 손이 그의 허리에 닿았다. 자연히 가까워지는 거리가 어색했다. 아니, 쑥쓰러웠다. 그러나 당사자는 불편한 마음에 감히 그런 이름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소년은 이유도 모르게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소리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물먹은 가죽벨트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가 한 순간 지은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어 세상도 그가 웃었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해체 작업이 끝났다. 톨비쉬는 홀가분해진 얼굴로 상쾌하게 웃었다. 약간의 아쉬움은 별 어려움 없이 삼켜 숨겼다.
“감사합니다. 훨씬 낫군요.”
“아니에요.”
고된 일도 아니었는데 지쳤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러서는 클로드를 보며, 톨비쉬는 따라하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에 걸쳤던 수건을 도로 머리 위에 얹어 털면서, 그는 짐짓 피곤한 척 뭉친 목 근육을 풀었다.
“늘 오가던 길인데 비 탓인지 좀 힘이 드네요. 그럼 좀 앉아도 될까요.”
“네.”
톨비쉬가 말을 잇지 않는 이상 그들 사이의 대화는 끊기기 마련이었다. 톨비쉬가 아닌 누구라도 클로드가 상대라면 그랬다. 알터 정도나 되어야 예외일 것이다. 그는 종종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조차도 가슴에 묻어둔 채 지나갔으므로.
방 안에는 마땅한 의자도 없었다. 톨비쉬는 개의치 않고 창 아래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클로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만 도르륵 굴렸다. 당황이 가라앉고 나니 톨비쉬가 아발론 게이트에 올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어쩌면 말하기 어려운 일일까.
툭툭, 주의를 끄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제 옆자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두 다리 쭉 펴고 앉아 웃는 얼굴이 어째 소년 같았다. 아직 젖어있는 머리칼 탓인지도 모른다.
“다리 안 아프세요?”
클로드는 머뭇머뭇 그가 두드린 자리에 앉았다. 앉고 보니 너무 가깝지 않나 싶어 움츠러든 그의 어깨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볼에도 닿아 맺힌다. 클로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 피곤하네요.”
톨비쉬는 더 말하지 않고 얹은 어깨에 머리를 부볐다. 어깨와 볼 사이에 끼인 머리카락이 얼추 빠져나가 편해지자 그는 몸에서 힘을 쭉 뺐다. 클로드는 그가 눈 감는 것까지 곁눈질로 살폈다. 행여나 불편하지나 않을까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톨비쉬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 모르게. 제 머리를 받치는 어깨가 잔뜩 긴장한 게 두터운 옷 너머로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가 저를 그만큼 의식하는 거라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그의 본성이나 다름없는 이성에 가로막혔다. 톨비쉬라는 사람이 아니어도 클로드는 똑같이 반응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시야 끝에 걸리는 손은 잡고 싶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사실 딱히 이유는 없다. 더 견디지 못하고 달려왔을 뿐.
“……좀 더 쉬었다가 얘기해도 될까요.”
“……네.”
잠깐의 유예를 번 그의 입가가 가늘게 호선을 그렸다. 클로드와 톨비쉬의 손 사이에 있는 건 반 뼘이 전부였다. 두어 번 손가락이 기어가면 닿을, 아주 짧은 거리. 그러나 톨비쉬는 손을 뻗는 대신 주먹을 쥐었다. 상상으로 그쳐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습기 찬 종이에 번지는 잉크로 뒤덮일 그런 상상들.
톨비쉬는 두고 온 편지들을 떠올렸다. 그 종이다발에 쓰인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추할 수 있었다. 그건 그의 계획서였다. 언젠가 현실이 될 그 모든 상상의 계획. 청사진.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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