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문이 무척 무거워보였다. 아니, 무거운 건 제 마음이다. 피네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손을 들었다. 똑똑, 두드렸으나 대답은 없었다.
“카즈윈.”
역시 대답은 없었다. 피네는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카즈윈, 나야. 들어갈게.”
잠시 기다렸으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카즈윈은 거절하고 싶었다면 직접 문을 열어 문간에서 용건을 처리할 사람이었으므로, 피네는 문고리를 잡아 천천히 돌렸다. 문 너머엔 4인용 테이블 하나로 꽉 들어차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카즈윈은 그 중 하나에 앉아 등을 보이고 있었다. 피네는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은 후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잡은 채로 문에 기댔다.
“카즈윈.”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나른한 표정이 반쪽짜리 얼굴로 그녀를 향했다. 피네는 천천히 걸어 그의 오른편 의자를 잡았다. 그는 피네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피네는 그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좀 심각한가봐.”
“그렇던데.”
“……그렇던데, 하고 끝날 일이 아니잖아. 징계라도 받으면 어쩔 생각이야?”
톨비쉬가 늦는 이유는 본부에 들러 단장의 전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거진 결정된 사항이었으니 큰일은 없겠지만 이토록 태연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었다. 그는 이유 없이 행동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번의 지나친 행동에도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피네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잘 보내줬어?”
“……글쎄.”
“또 그렇게 말한다. 오는 길에 다른 조원은 어쩌고 있나 보고 왔어. 괜찮더라. 이번에 임무를 다 한 그 아이도 편히 갔겠지.”
그는 답하지 않았으나 피네는 그가 맞잡아준 손이 대답이라고 느꼈다. 제 유해가 흔적조차 남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을까. 눈감기 전에 오래 아팠을까. 그 날 제 삶이, 오랫동안 걸어온 사명의 길이 끝날 줄은 알았을까. 편히, 갔을까.
피네는 그 중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카즈윈이 사명을 다한 자의 마지막에 소홀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오직 그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늦는군.”
“그러게. 곧 오시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이 놓여났다. 네, 피네가 대답하자 적당한 지체 후에 문이 열렸다. 톨비쉬는 변함없는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피네는 종종 카즈윈과 톨비쉬가 무척 닮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건강해보여 다행이군요.”
그는 방 가장 안쪽으로 걸어 카즈윈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아벨린은 침착하려 애쓰다 오히려 험악해진 얼굴로 피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서슬에 방안 공기까지 얼어붙는 듯 했다.
“아벨린. 이래서야 시작도 전에 끝나겠군. 좀 진정하는 게 어떻겠나.”
“제가 흥분하기라도 했나요, 톨비쉬?”
“그럼 말을 바꾸지. 표정 좀 풀게, 아벨린. 자네가 화난 이유는 잘 이해하고 있으니 굳이 그렇게 얼굴에 써둘 필요는 없네.”
“지금 장난하는 건가요?”
“나는 이 일을 최대한 가볍게 처리하고 싶을 뿐일세. 이건 단장님이나 원로회의 의견이기도 하네. 심각하게 다룰 필요도 없거니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해. 자네도 알지 않나.”
술렁이는 기사단 내부 분위기를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장들을 소집하기까진 했다. 그러나 일정 정도를 넘어 험악한 분위기가 되는 것까지는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아직 어리거나 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단원들은 주변 분위기에 곧잘 휩쓸린다. 그러나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 외부 요인 탓으로 휘둘리는 일은 없는 편이 좋다.
“이 이상 혼란이 가중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만, 카즈윈.”
“듣고 있어.”
“이번 일은 당신의 독단이었다고 해도 될까요?”
“‘해도 될까요’가 아니라 독단이죠. 상의 한 마디 없이 저질렀잖아요?”
“아니,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카즈윈은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시신을 화장했고 우리 셋을 포함한 나머지 지도부는 기사단원의 시신이 사도의 재료가 될 가능성을 이번에 인지한 걸로 했으면 하네.”
“뭐라고요?”
펄쩍 뛴 건 아벨린이었다. 등을 곧게 펴고 한껏 몸을 뒤로 빼고 있던 그녀는 테이블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 당장이라도 톨비쉬에게 달려들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톨비쉬는 카즈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카즈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내 독단이었어.”
“카즈윈……!”
피네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 카즈윈의 팔을 잡았다. 톨비쉬의 제안대로 일을 처리할 경우 카즈윈이 질 부담이 무척 커질 게 눈에 보일 듯 훤했다. 그의 탓이 아닌 일로 숱하게 원망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징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즈윈은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피네의 손등을 한 번 도닥였다. 들어 올려 잡혔던 쪽, 오른손에 얹어서는 한 번 힘주어 잡더니 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톨비쉬를 보고 있었다.
“조원급 이상의 단원의 장례는 화장으로 처리할 것을 건의하겠어.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으니 그 재 또한 남기지 않을 것 또한.”
“카즈윈,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 부담을 혼자 다 지겠다고요?”
아벨린의 얼굴은 이미 방에 들어올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 모든 사항은 비단 그만의 결정이나 주장이 아니라 지도부 전원이 동의한 바였다. 카즈윈은 일부러 그 내용을 다시 선언함으로써 그 모두를 완전히 그만의 책임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카즈윈은 아벨린과 잠시 시선을 맞췄다. 카즈윈은 그녀에게 대답 대신 더한 것을 안겨주었다.
“……한 가지 더. 최근 일 년 이내에 사망한 단원은 전부 화장할 것까지.”
방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톨비쉬마저 표정을 굳히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나, 둘, 그리고 셋까지의 정적.
“……과격한 제안이군요.”
“당신이 할 말은 아닐 텐데.”
그 말의 의미를 눈치 채기에는 피네도 아벨린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톨비쉬는 쓰게 웃는 것으로 무마했다. 카즈윈이 덧붙이지 않았다면 그 자신이 추가적으로 덧붙이려던 사안이기는 했다. 그보다야 좀 더 온건한 말을 고르기야 했을 것이다.
“제가 추가적으로 제안하는 식은 어떻습니까.”
“간단할수록 좋아. 이번엔 내게 넘겨.”
“좋습니다. 그렇게 보고하도록 하죠. 전부 짜고 치는 연극은 아니게 되었지만 피네, 아벨린. 두 사람도 잘해주셔야 합니다.”
“잠깐…… 마지막은 뭐예요? 묘지를, 무덤을 파헤치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아벨린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서버렸다. 너무 놀란 탓에 약간 자세가 엉거주춤했으나 그녀는 곧 똑바로 섰다. 피네는 그녀가 또 화를 낼까 순간 긴장했다. 그녀를 말리려 언제든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는데, 아벨린의 입을 통해 쏟아진 건 고함소리가 아니라 한숨이었다. 피네는 그제야 그녀 얼굴에 분노가 조금도 나타나있지 않은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거기까지 생각했죠?”
“…….”
“……됐어요. 지금 이 난리가 어떤 이유에서 기인했는지는 알아요? 단원들이 무엇에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 아냐고요.”
“알고 있어.”
“이 모든 게 당신 독단이라고 하면 그들 중에 분명 당신을 배척하려는 자가 생겨요. 그런데 그걸 가중시키겠다고?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어요?”
혼란과 걱정, 약간의 죄책감과 좌절까지 뒤섞인 탓에 아벨린의 목소리는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피네는 그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카즈윈의 부담이 너무 컸다. 같이 짊어져야 할 짐을 그에게 전부 떠맡기고 있는 꼴이었다.
무덤을 파헤쳐야 할 필요성은 부연설명 없이도 그들 모두 말이 형태를 갖춘 그 한순간에 이해했다. 용암에 몸을 던져 시신 한 조각 남기지 않으려 했던 피네의 선례가 있어 뼈저리게 통감하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문 안에 갇혀 있지만, 선지자들은 그들의 의식을 속이고 이 아발론 게이트 안에 너무나 쉽게 침입했다. 그들처럼, 혹은 그들 이상으로 의식을 속일 수 있는 적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므로 모든 가능성은 배제해야 했다. 알반 기사단의 묘지에는 신성력을 가졌던 자들 수백이 흙을 덮고 잠들어 있다.
카즈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말해 뭘 하겠어요. 그런 제안까지 했다는 건 당신이 이번 사태에 꽤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들을 겪고도 당신을 믿지 못한다고는 안 해요, 저도.”
카즈윈도, 피네나 톨비쉬도 그녀의 말은 의외였던 모양이지만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놀란 얼굴이었다. 안 해요, 중얼거리듯이 입안에서 그 꼬투리를 굴려보던 아벨린은 침착해진 얼굴로 카즈윈을 한 번 마주보고,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더 의논해야 할 일이 없다면 전 이만 임무로 복귀하겠습니다.”
톨비쉬는 잠시 지체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린은 미련 없이 방을 떠났고 그녀가 비운 자리를 채운 침묵이 무겁게 제 존재를 피력했다. 으흠, 톨비쉬가 다른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아마 별다른 징계는 없는 방향으로 해결되겠지만 조만간 연락이 갈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카즈윈. 헤루인 조에도 인원을 보충해야 할 테고 말이죠.”
“……그러지.”
짧은 인사 후, 방에는 다시 둘만 남았다. 카즈윈의 조원은 아발론 게이트에 있으니 그야 급할 게 없지만 피네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망설임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즈윈은 생각할 게 있는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도 가야겠다. 몸조심해, 카즈윈.”
“너도, 피네.”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던 피네는 걸음을 멈췄다. 카즈윈의 세 번째 제안을 들은 순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 망설임의 기제였다. 피네는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카즈윈.”
“응.”
“……이번에 사망한 조원 말이야. 그 사람 안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사명을 위해 삶을 바쳤으니 그 죽음은 평안해야 할 것이다. 사명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안식을 얻은 자들의 유해를 다시 한 번 땅 위로 끌어내어 불에 던지는 일은 결코 기꺼운 게 아니었다. 더구나 책임졌던, 그러나 살리지 못한 목숨이라면 더더욱. 피네는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글쎄.”
“아냐?”
“……아니진 않아.”
솔직하기를 어찌나 어려워하는지. 그런 식으로밖에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그 말은 마침표나 다름없다. 피네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가, 한 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위로하고 싶은 건 제 욕심일 뿐, 그는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았다.
“준비 됐습니다, 조장님.”
카즈윈은 몸을 일으켰다. 조원이 쌓아둔 장작더미 앞에 다다른 그의 팔엔 영원한 잠에 든 기사가 안겨 있었다. 제 사명을 다하고 부러진 검이다. 카즈윈은 그 검을 장작 위에 뉘였다. 뻣뻣하게 굳기 시작하는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도 배 위에 겹쳐 올렸다. 그러고서 그 손과 감은 두 눈을 제 손으로 덮었다. 그는 소리 없이 기도했다.
한 평생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벼린 칼날의 삶을 살았던 당신의 검에게 한 조각 안식을 주소서.
그는 손을 떼고 물러났다. 옆에서 건네어지는 횃불을 받아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작더미에 불을 놓았다. 순식간에 커진 불은 자신이 품은 것의 무게를 아는지 더 세차게 타올랐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즈윈은 그 자취를 아주 오래도록 눈으로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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