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님이 신청하신 밀레시안x카나(벨테인 특별조) 작업하였습니다. 본 세계의 반신의 이름은 아레이스입니다.
1만자 이상 사양으로 부분공개 허락해주셨습니다. 신청 감사합니다!
2.
아레이스는 무대에 올랐다. 막이 오르고, 사내는 배역의 가면을 쓴다. 스포트라이트가 태양빛처럼 쏟아졌다. 관객이 박수를 보낸다.
신들의 감옥 아본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주인과 함께 에린을 떠나면서 남기고 간 부스러기들이 저들기리 뭉쳐 다녔다. 세기의 작가가 사라진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이후로 무대 위에는 졸작 중에서도 졸작만이 올랐다. 예술성도, 아름다움도 모두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으로 스물세 번째다. 연기를 마친 배우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얼굴이 없어 보는 눈도 없는 관객들은 관성적으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가치를 둘 수 없는 건조한 파열음이 가면의 끈을 풀어냈다. 다시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온 사내는 미련 없이 뒤돌아 무대에서 내려왔다. 짧은 케이프를 두른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무늬 흰 가면이 눈 주위와 볼 일부를 가려 표정을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연극은 재미있으셨습니까?”
말로는 매번 극의 마지막, 커튼콜 즈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무대에 매료된 남자이니 극을 보긴 했을 텐데, 제 연기나 이야기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아레이스는 이전에 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며 열에 들뜬 것처럼 감상과 기대를 쏟아내던 모습을 기억해내고 엄습하는 착잡함에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스스로조차 만족시킬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것치고는 매 번 오십니다.”
무시하기로 했다. 멈췄던 걸음을 마저 옮기는 그를, 말로는 잡지 않고 보내줄 것처럼 굴었다. 벽으로 물러서 길을 터주고 고개를 숙인다. 그는 금방 벽에 녹아들 것처럼도 보였다. 사실, 저런 자야말로 진정한 배우가 아닐까. 어디에나 녹아들 수 있는, 그렇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런. 반신은 급격한 피곤을 느꼈다. 등에 진 반신의 날개는 이따금 과하게 제 무게를 일깨웠다.
그를 지나쳤을 때였다.
“오늘 극 말입니다.”
기대인지 불안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발걸음이 다시 붙들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제 귀가 야속했다. 그것은, 엄연한 기대였다.
“비극적이더군요.”
“……어느 부분이?”
아레이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주인공은 몇 가지 역경을 재치와 능력으로 거뜬히 물리치고 명예를, 그리고 사랑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원하던 것, 동방의 지식을 찾아 훗날을 기약하며 여행길에 오를 결심을 한다. 가족은 그를 사랑하고 연인은 그와 함께 하길 약속했다. 그의 앞날은 밝다. 비극이 아니었다.
“어느 부분이 비극이라는 거지?”
“당신이 주역이었다는 점 말입니다.”
아레이스는 기어이 돌아서고 말았다. 에린의 영웅, 반신을 뒤돌게 한 사내는 오만하게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다. 아레이스는 가까스로 그의 멱살이라도 틀어쥐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내 존재 자체를 말하는 건가?”
“당신과 이 극의 관련성을 말하는 겁니다. 엄밀히 말해, 오늘 무대는 그 때문에 평소보다 예술적이었습니다. 마치 아레이스라는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비극적 사건 같았죠. 그 자신과는 정반대의, 대조적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비극…… 아름답지 않나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언제까지 참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조만간 한계일 겁니다. 당신도, 당신이 아낀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도.”
아레이스는 결국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옷깃까지 겨우 손가락 한 마디를 남기고 그의 손은 허공에 멈췄다. 닫힌 눈꺼풀이 서서히 열려 그를 비췄다. 거울 같은 눈이었다. 그는 없고, 자리엔 오로지 아레이스뿐. 마법의 거울이 묻지도 않은 진실을 읊었다.
연극에는 결말이 있습니다. 끝이요.
4.
아벨린은 이틀이 지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 이틀 간 카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몇 번이고 확인 받았지만, 꼼짝 않고 눈 한 번 뜨지 않는 창백한 얼굴의 자매를 보는 것은 어렴풋한 각오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두어 번쯤 울었던 것 같다. 한 숨도 자지 못했고…….
한 번도 아레이스를 보지 못했다.
마음이 안정되고 나서야 깨달은 그 사실은 무척 그녀를 심란하게 했다. 자잘한 임무에서 다쳐 돌아와도 꼭 직접 상처를 보던 사람이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넓어봤자 아발론 게이트는 절벽 안에 숨은 요새였다. 그 한정된 공간에서 이틀이나 보지 못한…… 연인이라니. 카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 관계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게 가당키나 한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며 걸었더니 어느새 목적지였다. 문고리로 손을 뻗던 카나는 들려오는 말소리에 굳었다. 방 안에 언니 말고도 한 사람, 목소리.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뒀어.”
“이렇게 통보로 끝날 일인가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군요. 이렇게 떠난다고 해결이 되나요, 아레이스님?”
그 이름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엇박으로 깨닫는다. 떠난, 다고?
“……톨비쉬에겐 말해뒀어. 카즈윈이나 피네는…… 기회가 닿는다면 설명하지.”
“믿을 수가 없네요. 실망스럽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 두고 그게 할 말인가요?”
이해와 거부가 동시에 태어났다. 카나는 한 발짝 뒤로 내딛었다. 떠난다고. 누가?
“카나는 어쩔 거예요.”
마음속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 심장이 깨졌나봐.
“……카나한테도 말 안 한 거예요?”
“빨리…… 자리 털고 일어나길 바라지.”
달칵, 카나는 충분히 민첩하지 못했다. 문을 열고 마주친 눈이 차가워. 차갑게 느껴져. 착각이죠? 방금 들은 게 사실이 아닌 것처럼.
바람이 그녀를 떠났다.
“아레이스님! 이봐요!”
인식과 이해가 유리된다. 심장 깨진 자리가 서늘하니 얼어붙는 것 같다. 세상이 돌았다. 뒷모습. 긴 머리카락이 걷는 모양대로, 혹은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모습. 저 뒷모습이 너무나 좋았더랬다. 동경하고, 또 동경하다가 사랑이 되었다. 사랑이 되었다.
사랑이 그녀를 떠난다.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금세 잊었다. 카나는 그 뒤를 쫓아 달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릉, 하늘이 운다. 굵게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군대처럼 불어났다. 앞머리고 옷이고 다 젖어 늘어져 무겁다. 카나는 숨을 헐떡였다. 비 내리는 스카하 수원지는 온통 잿빛이라 무채색 뒷모습을 금세 놓쳤다. 없다. 카나는 방향을 바꿨다. 여기가 아닌가, 여기도? 어디로 가야.
우르릉……. 천둥이 땅에서도 쳤던가……?
스카하 수원지에는 수정으로 된 골렘이 돌아다녔다. 성질이 난폭한 데다 단단한 주먹은 뭇 남자들 머리통쯤은 쉬이 깨부쉈다. 그게, 카나를 보고 있었다. 빗물 맞은 돌덩이가 물안개에 감싸인 듯해 멀어보였다. 몽롱하다. 카나는 그게 저를 휘둘러지는 모습을 넋을 빼고 바라보았다.
쾅…….
“……조장님.”
비 퍼붓는 돌바닥에는 피어오를 먼지 따위는 이미 쓸려가고 없었다. 귀히 여겨지는 수정 더미 속에 그는, 부스러기 잔해를 밟고 서 있었다. 물안개가 금세 죽었다.
“조장님!”
그는 대답하는 대신 돌아봐주었다. 비어 젖은 앞머리가 늘어져 눈을 가린다. 카나는 조금 전 본 것을 상기하고 흠칫 놀랐다. 착각이었을까. 아까 보았던 그 차가운 눈은, 착각이었을까.
왜 울 것 같은 표정이에요.
“어디 가세요?”
“…….”
“어디…… 가세요.”
이런 걸 묻고 싶은 게 아니었다. 말하고 싶은 건 이게 아냐. 조장님, 아레이스님.
“……죄송해요…….”
“네 잘못이 아냐.”
“제 잘못이에요!”
그간 느꼈던 숱한 불안이 주마등처럼 그녀를 스쳤다. 어긋남, 혼란, 직감……. 어쩌면 그는, 내가 보던 게 전부가 아닐지 모른다고. 언제까지나 단단한 뒷모습으로 서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네 잘못이 아냐.”
저렇게 약한 사람인 줄 왜 미처 몰랐을까.
“내가…… 네가 바라는, 그런 사람이 아닌 탓이지.”
“…….”
“……네겐 더 미안하다. 이런 식으로 끝내서 미안해. 네 잘못이 아냐. 내가…… 내가 견딜 수 없어서 그래. 용서해.”
무얼 용서하라는 건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는 싫어요. 내내 느껴지던 그 모든 예감을 피했어요.
“조장님.”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안 가시면 안 돼요……?”
그 한 마디를 겨우 했다. 둑이 무너지면 물이 쏟아진다. 찬 빗물 사이로 뜨거운 것이 함께 흘렀다. 빗발로 잘게 쪼개진 세상이 이지러졌다. 마치 꿈처럼.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다가오는 당신도, 얼굴에 닿은 차가운 손도, 깊이 없이 오래 맞닿은 입술도, 전부. 손이 그를 붙들겠다며 허공으로 솟았으나 곧 추락했다. 잡을 자격이 어디 있다고.
찬 공기가 입술의 열기를 빼앗아갔다. 카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얼굴에 닿은 손이 그대로였다. 가지 않았다. 감각이 배신하지는 않아서 시야에 꽉 들어찬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난 신이 아니야.”
이별은 마지막으로 이마에 끝을 맺었다. 입술이 덥혀둔 온기가 마침표를 찍는다.
곧 차게 식었다. 그가 떠났다.
“그러게 내가 뭐랬니?”
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던져진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할 말이 없었을 따름이다. 아벨린은 더 화도 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러진 팔다리가 도통 붙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게 너무나 답답했다. 사지라도 멀쩡했다면 쫓아가지 못하게 말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저 관계의 시작부터 막았어야 했다.
카나는 내내 무릎 위에 던져진 제 손만 보고 있었다. 도통 표정을 가늠할 수가 없으니 말도 섣불리 꺼내기 어려웠다. 전신에 열처럼 번져 있던 화가 걱정에 눌려 점차 사그라들었다. 바탕이 다정한 사람인 탓이다. 자매는 가장 본바탕만큼은 꼭 닮아 있었다.
“괜찮니?”
“…….”
“……가면서 뭐라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반사적으로 열린 입술 새로 차디찬 숨만 몇 번씩 드나들었다. 아벨린은 좋은 기사인 동시에 언니였다. 그녀는 침묵을 오래 견뎌주었다.
드디어, 기다림이 빛을 보았다.
“내 잘못이…… 아니래.”
“……그렇지. 뭐든. 네 잘못은 아냐.”
“……하나 있어.”
아벨린은 입을 다물었다. 하나. 하나 있다는 건,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선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부 제 탓이라며 뛰쳐나가던 며칠 전과는, 이제껏 보아온 카나와는 달랐다. 겁이 덜컥 났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카나?”
“하나는 내 잘못인 걸. 정말, 가장 중요한 그 한 가지가 내 탓인 걸…….”
투둑, 빗소리가 귀를 직접 파고들었다. 맑은 날이었다. 비 뿌리던 구름이 간 데 없고 물웅덩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오후. 방안에 때 아닌 빗소리가 시작됐다.
“카나?”
“내가 그 분한테……, 그 분한테, 얼마나, 나쁜……”
장대비였다. 소나기처럼 거센, 그러나 훨씬 긴 울음이었다. 카나는 기어이 제 손 위로 무너졌다. 손가락 틈으로 흐른 빗물이 치맛자락을, 무릎을 적셨다. 빗속에서 그가 했던 말들이 파문처럼 떠올랐다.
나는, 신이 아니야.
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이제야 알아요. 길잡이를 잃어 헤매는 당신에게 길을 가리켜달라고, 눈앞에 굳건한 뒷모습으로 서달라고 요구했던 지난날을 후회해요. 내 마음의 시작이 당신을 가장 비참하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는 걸 알았을 때 당신은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무슨 마음으로 내게 웃어줬을까.
내가 당신의 여신이 되지는 못했더라도,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떠나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그런 끝은 없었을까요? 당신도 울고 있었잖아.
당신이, 다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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