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을 빼앗기기 싫으시면 어서 들어가십시오.”
간수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낭비 없는 움직임으로 열쇠를 따고, 육중한 철문을 위로 올리는 움직임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허리를 수그려 그 틈으로 억지로 몸을 욱여넣었다. 철문 끝에 걸려 머리채가 뒤로 홱 잡아채어졌으나 순간이었다. 턱 아래에 동여맨 끈이 풀려 풍객모 안에 말아 넣었던 머리카락이 파도치며 쏟아져 나왔다. 뜨뜻한 머리카락이 볼을 감싸다가 뒤로 홱 나부꼈다. 나는 돌로 된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내렸다. 텅, 그 크기만큼 무거운 모帽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의 벽에 메아리를 부딪치며 나를 뒤쫓았으나 차라리 홀가분했다. 나는 목을 죄는 옷깃을 풀어헤치고 등 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홀가분했다.
몇 번이나 방향을 틀어가며 소음을 쫓아 아래로 달음질쳤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오랜 시간 지하에 고여 있던 탁한 공기가 숨을 조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 따위는 내 발을 느리게 하지도, 내 어깨를 움츠러들게도 하지 못했다. 소음과 열기가 가까울수록 열이 올랐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여자. 제 출신을 알고 기세가 등등하여 돼먹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던 여자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가증스럽게 어여쁜 얼굴에 근심을 가장하고 도움을 요청했겠지. 부탁한다며, 나를 위해 그를 죽여 달라며 뭇 병사들의 혼을 쏙 빼놓았을 것이다. 제 어미의 혼백은 그리도 깨끗하고 아름다웠거늘 그 쏙 빼닮은 얼굴로 어쩜 그렇게 다른 짓을 하는지. 하물며 그는, 도천풍 대사형은 그녀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시야가 하얗게 타는 듯하여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며 검을 바투 잡았다. 생각이 깊어지면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내 좋지 않은 버릇 중 하나였다. 감정이 격해지면 주위 사물을 분간하질 못했다. 그 못되어 먹은 천성 탓에 감정에 몸을 내맡겨서 결과가 좋았던 적은 없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시금 사물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지척에 이미 올라간 철문이 있었다. 간수를 몰아세우고 있는 죄수 셋이 가장 가까운 적이었다.
가장 가까이 등을 보이고 선 자를 곧바로 찔러 들어갔다. 평범한 죄수였다. 뼈를 부수고 제대로 심장에 박혔다는 확신이 들었다. 옆으로 휘둘러 빼내며 그대로 반 바퀴 돌자 간수에게 주먹을 내뻗던 다른 죄수의 팔이 잘려나갔다. 죄수들은 난입자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마 또 다른 죄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난입자의 검이 간수가 아닌 저들을 향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두 호흡 만에 세 사람의 피가 바닥에 웅덩이를 그렸다. 그대로 몸을 날려 앞으로 뛰어들었다. 뭔가 이변을 눈치챈 죄수 둘이 한 번에 달려들었으나 무기도 들지 않은 맨주먹은 두렵지 않았다. 더구나 오랜 투옥생활에 지친 그들이 몸에 두를 것은 악밖에 없었다. 측은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은 자명했기에, 괜한 여지를 줄 수는 없었다. 세 호흡으로 충분했다. 그들 중 하나는 목을 베었다. 잘린 동맥에서 솟아오른 피가 우연히도 또 다른 간수를 몰아세우고 선 세 죄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뜨끈한 비린내에 놀란 세 사람의 등을 베는 것은 쉬웠다. 역겨우리만치.
“덕분에 목숨을 건졌소. 고맙소이다!”
대꾸하고 싶지 않아 고개만 끄덕이며 검에 묻은 피만 바닥에 뿌렸다. 여덟. 그 숫자가 머릿속에 도금된 것처럼 반들거렸다. 뒤이어 비무 때 당황하여 나를 보던 도천풍 대사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문의 무공에서 마도의 기운을 읽어내고, 화도 내지 못하고 당하던 그 얼굴. 그가 곧바로 분노치 않은 것은. 아니, 그가 곧바로 분노치 못한 것은 내가 홍문의 길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홍문의 가르침을 저버린 나는 남소유에게 이용당할 뿐인 이 자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토악질이 치밀었다.
생각은 독이었다. 머리를 털어내며 간수를 보았다. 그는 아, 외마디 탄성과 함께 이마를 치더니 잠긴 문을 조작했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움직임은 간수들이 꼭 터득해야 하는 기술임에 틀림없었다.
“지금쯤이면 다른 풍객들은 특별 수감실에 당도했을 거요.”
우르릉, 소리를 내며 육중한 철문이 올라가고, 또다시 허리를 수그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특별 수감실이라면 지하 가장 깊숙한 곳일 것이다. 내려가던 도중 통로를 뛰어 올라오는 죄수와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검이 뻗어 나갔다. 달려 내려가던 나와, 달려 올라오던 그가 정면으로 맞부딪힌 결과는 처참했다. 내 검은 척추를 절단 내었다. 멍한 머릿속과는 별개로 몸은 잘만 움직였다. 내 어깨에 떨구어진 머리를 밀어내고, 발로 그 어깨를 차 검을 빼내는 광경을, 나는 마치 남이 저지르는 일 마냥 보고 있었다. 철퍽, 내장이 흘러나왔다. 붉었다. 아홉이었다.
열, 열하나, 열둘……. 열일곱. 내 손으로 베어 넘긴 죄수가 열일곱. 또다시 간수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번에는 문이 다 올라가기를 기다려 신발을 벗어 버리고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차디찬 돌바닥에 소름이 돋았으나 필요한 일이었다. 문 너머 지하에서 들리는 소란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리쳐지는 도끼를 미끄러뜨렸다. 바닥에 처박힌 도끼자루를 밟고, 미처 몸을 빼지 못한 풍객의 목을 그었다. 칼끝이 목뼈를 긁는 감촉이 생경했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는 불현듯 왼손으로 목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선뜩했다. 베어버린 것이 내 목인 것처럼.
오래도록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날아드는 검을 쳐 내리고 곧장 앞으로 내찔렀다. 내력을 담아 내지른 검은 사내의 복부를 꿰뚫고 등 뒤로 코를 내밀었다. 울컥, 피를 양껏 토해낸 남자가 뻐끔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왜 너 같은 자가…… 풍객에……."
검을 빼내며 휘둘러 날아드는 수리검을 쳐 내었다. 상대에게 달려들어 가슴을 내리긋자 그는 나무토막으로 변했다. 어깨를 긴장시키며 뒤로 돌았다. 도박을 해야 하는 건 멍청한 짓을 저지른 대가였다. 예측한 곳으로 칼을 내뻗자 맞닿는 것이 있었다. 힘껏 위로 쳐올리자 암살자가 몸을 드러냈다. 틈을 노릴 여유는 없었다. 어깨로 밀치고, 다리를 걸어 쓰러지는 남자의 어깻죽지에 검을 박아 넣었다. 무게를 실어 비틀자 핏줄기가 솟았다. 사내는 사지를 경련하다가 이내 눈을 하얗게 까뒤집었다. 숨을 가다듬으며 검을 뽑아 피를 뿌렸다. 그가 스물두 번째였고 마지막이었다.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간수를 뒤로하고, 나는 철문의 장치를 조작했다. 잠금장치는 진즉에 풀려 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큰소리를 내며 철문이 올라갔다. 그 잠시 동안, 나는 몸을 돌려 배가 헤집어진 풍객을 보았다. 나 같은 자라는 건 무얼 말하는가? 묻더라도 대답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명계의 주민이었다. 실력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무공에 서린 기운을 읽어낸 것인지는 이제 영영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물은 것이 후자라면 무어라 답해야하지? 홍문의 가르침을 버리고서도 나는, 여전히 홍문파의 마지막 계승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의 복수를 목표로 삼고 있으니 그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신의 손을 잡은 나는 그들의 배신자였다. 풍객이 되어 무고한 자들을 발아래 두었던 일을 당신들이 아셨다면 크게 꾸짖으셨을까. 나를 파문하셨을까.
문득 무성사형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무너지는 그 건물 아래에 묻히던 그 배신자처럼, 이 뇌옥이 무너져 나를 묻어버리기라도 할까.
머리가 아파왔다. 생각은 독이다. 머리를 비우고 검을 갈무리했다. 철문 너머로 한 걸음 내딛고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소리가 없었다. 무기끼리 맞부딪는 소리도, 기합소리도 없었다. 살기殺氣도 느낄 수 없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모두 끝난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들이었다. 나에게 내공을 뺏겼다 하더라도 고작 이런 풍객들이나 죄수들에게 당했을 리가 없는 자들이다.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있을 리가 없는 일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은 초조했다. 꺾여 내려가는 계단을 훌쩍 뛰어넘어 착지하고, 그대로 뛰어들었다. 열린 철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풍객과 죄수들의 시신 몇 구, 그리고…….
“대협! 오실 줄 알았습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린족 특유의 목소리. 아는 자였다. 뇌옥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간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웬 꼬마가 찾아와서 점괘가 어쩌고…….’
감마등이었다. 팔부기재, 흑풍술사 감마등.
발이 땅에 붙은 것 마냥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내 옷을 훑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묵화의 기운과는 다른 성질의 어둠도 읽어내었을 것이다.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창피스러웠다.
“점괘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대협이 결국 어둠의 길로 드시다니……. 뇌옥에 가두신 친구분들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바닥에 누운 시신들 사이에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천천히 다가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쥔 검에 묻은 피 또한 창피스러웠다. 당신들이 기대를 걸고 그만큼 헌신한 자의 모습이 이러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무신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되었다. 순간의 감정에 몸을 내맡겨서 결과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구분들은 제가 용맥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이곳에 갇혀 있던, 도천풍 단장님의 지인분과 함께요."
“어디로 빼돌렸지?”
날을 잔뜩 세운 말이 그를, 그리고 나를 베었다. 그는 슬픈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이 나를 한 번 더 베었다. 말을 해야 했다. 후회하노라고, 이제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노라고 말을 해야 했다. 허나 입이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이제껏 저지른 배신이나 악행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이 자리에서 한두 마디 말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대협이 더 큰 죄를 짓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그 한 마디를 내어 놓으며, 감마등의 눈에 무언가 비쳤다. 단호한 결의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마음 한 구석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죄송하지만 대협, 저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협이 마도로 빠지는 것을 막을 겁니다. 앞으로의 무례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합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용맥 너머로 사라졌다.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시야가 알 수 없는 빛으로 일그러지고서야, 나는 내가 그를 쫓아 용맥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잡아야 했다. 잘못될 일은 바로잡아야 했다.
나는, 그 너머에서 기다리던 자들이 무엇을 예비해 두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귀문관에서는 악몽이 되풀이된다. 사난사는 검에 들러붙은 혈강시의 썩은 살점을 털어내고 뒤로 돌았다. 백가휼과 조현조, 천 승아현이 이제 막 만령강시를 바닥에 눕혀놓은 참이었다. 백가휼이 검게 스러지는 그 시신을 밟고 넘어왔다. 그 뒤에서 조현조가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휼은 기분이 좋은 듯 싱글거렸다. 그가 밟고 넘어선 살점이 부스러져 바람에 가루로 날린다. 탁기에 물든 것은 검기만 했다. 난사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 자취를 좇다가 갈 길을 잃었다.
“난사야.”
고작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선을 내리자 어느새 옆에 와서 선 승아가 고개를 까딱한다.
“정신 차리고. 가자, 문 열렸어.”
정신 차리고, 그 말에 괜히 모골이 송연했다. 탁기가 가득 들어찬 이 곳 귀도시에서 정신을 빼놓고 있는 건 죽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정신 차려야지, 사난사가 바짝 신경을 곤두세워 호흡을 가다듬자 백가휼이 한숨 비슷하게 빈정거렸다.
“저게 어딜 봐서 정신 차린 거야? 쓸데없이 긴장한 거지.”
사난사가 찔끔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백가휼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조현조를 돌아보며 서더니 시선은 사난사에 두고 묻는다. 저를 놀리려는 것임을, 사난사는 숱한 경험으로부터 알아챘다.
“이제라도 사람 두엇 더 모아볼까, 형?"
“적당히 해, 가휼.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예이, 예이. 장난도 못 치나.”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사난사는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매번 울컥하고 만다. 제 도발에 넘어온 것을 안 가휼이 킥킥거리는 것을 한 번 째리고, 난사는 승아의 옆에 섰다. 그러나 감사라면 모를까, 그에게 화낼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진 건 사실이었다.
모용중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육중한 문에서 거슬리는 쇳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감옥의 철창 같은 문이 서서히 올라간다. 이 너머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은 같은 검을 쓰는 가휼이 주지시켜 주었다. 봉마핵을 활성 시켜 귀문관으로 향하는 문을 열 것. 갈마왕을 처치할 것. 하루에 한 번 그 일을 해내야만 귀도시의 탁기를 감당해 낼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남에게 미루어 두었던 일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의 스승을 만났던 이 도시는, 한동안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저리게 했었다. 승아가 빠르게 말했다.
“난사는 태상 쪽으로, 나머지 둘은 알아서 해. 내가 신시 쪽으로 갈게.”
땅을 박차려던 발이 절로 굳었다. 크게 앞뒤로 흔들리는 난사를, 승아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깨닫기도 전에 입이 먼저 물었다.
“신시?”
“응. 그건 내가. 난사 너는 태상으로.”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었다. 고개를 내젓는데 뒤에서 가휼이 가볍게 짜증을 내었다. 같은 것을 여러 번 설명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흑신시는 승아누님이 잡는다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설명해준 대로 해서 폭마인 잡고 봉마핵 활성 시키면 끝이야. 난사누님은 더 신경 쓸 것 없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설명, 혹은 질문을 해야 할, 입술은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애초에 머릿속부터 하얗게 뒤엉켜 할 말조차 없었다. 말없이 굳어있는 그녀를 움직인 인물은 의외로 조현조였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한 존재감으로 스륵 움직인 그가 열린 문을 넘어가자, 사난사는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움직였다. 곧 승아와 가휼이 따라붙었다. 가휼은 앞선 현조를 따라 가버리고 승아가 난사와 속도를 맞추었다. 흘긋 올려다 본 사난사의 표정은 여전히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난사야.”
놀라 돌아보는 얼굴은, 마치 칼에라도 찔린 것 같았다. 승아는 이럴 때 난사가 필요로 하는 말이 무엇인지, 또 어떤 식으로 말해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사난사는 이따금 길 잃은 어린애처럼 굴었다. 길을 가리키며 등을 떠밀어 주어야 하는 어린애처럼.
“정신 차려.”
사난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이 자극이 되었다. 뒤이어 응, 하고 대답도 할 수 있었다. 해야 할 일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 외의 생각 잡념은 그녀에게 있어 독이었다. 그녀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지 못했다.
갈마왕의 유해가 스러지는 모습은 만령강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난사는 회복약을 들이키며 몸을 일으켰다. 내공을 주입해주던 백가휼이 피식거렸다.
“어째 한 번도 안 눕는 적이 없어요.”
운기에 집중하던 사난사의 미간이 한 번 꿈틀한다. 감은 눈이 금방이라도 뜨일 것처럼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기가 흐트러지자 승아가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며 내공을 더 뿜어냈다. 사난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난사는 일어나자마자 제 검부터 찾아 갈무리하고 승아에게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고마워.”
“뭘. 자주 다녀버릇 해.”
난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뒤돌아 있자니 백가휼이 팔짱을 끼고 은근한 표정으로 그녀를 계속 보고 있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무시하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싫은 일은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나았다. 난사는 뒤돌아 빠르게 너도, 라고 덧붙였다. 트집을 잡으려면 두어 가지는 더 잡았겠지만, 백가휼은 가상하다는 듯 씩 웃고는 조현조에게 돌아섰다. 난사는 저도 모르게 내쉴 뻔한 안도의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어디 갈 데 있어?”
승아가 물었다. 애초에 약속한 것은 이곳 하나뿐이었고, 이후에는 무일봉으로 돌아가 아이들의 수련이나 봐 줄 참이었다. 그러나 사난사는 무일봉이 아니라 다른 곳을 떠올렸다. 오늘 아이들의 수련은 봐주지 못할 성 싶었다. 보아야 할 것이 있었다. 승아, 하고 부르자 그녀가 돌아보았다. 종종 깨닫듯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진영사저를 떠오르게 했다.
“흑신시……, 늑대구릉에 있는 것과 같아?"
“그게 신경 쓰였어?"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하려면 그것을 보아야 했다. 그것을 보아야 무엇이 자꾸만 마음 한 자락을 잡아끄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귀도시의 흑신시를 이미 승아가 처치했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난사는 이유 모를 절실함으로 승아를 마주보았다.
“비슷하지. 훨씬 약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 귀도시가 탁기로 가득 차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아. 그 쪽 흑신시는 난사 너도 혼자서 충분하지 않나?”
“모르겠어. 한 번밖에 가보질 않아서.”
그곳의 흑신시도 몇 번이나 되살아나더라고 소문은 전해 들었다. 그리고 사난사는 귀를 닫았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모두 피했던 탓이다. 애초에 알기부터 거부했으니 아무것도 몰랐던 탓에 놓친 것도 분명 있을 터다. 그러나 무엇을 놓쳤는지, 아직까지도 모르는 게 많다. 흑신시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 셋이 아니었다면 훨씬 이후까지 몰랐을 것이다. 나쁜 버릇인 것을 이제는 안다. 고쳐야 했다. 승아가 물었다.
“가보게?"
“응.”
좀 떨어진 곳의 가휼과 현조에게 눈인사를 하고, 난사는 내공을 모아 팔괘를 그렸다. 은은한 풀빛 기운이 바닥에 괘를 그려 나간다. 기운을 더듬어 이은 곳은 늑대구릉. 흑신시가 되살아 나는 곳. 이제 몸을 싣기만 하면 되었다. 직접 발로 뛰어 이어놓은 축지길은 용맥을 여는 것보다 차라리 안전했다.
“난사야.”
공중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다음에 무어라 말하는지는 다 듣지 못했다.
하늘은 파랗고 들판은 푸르다. 깨끗한 물을 떠받치는 대지는 단단했다. 그러나 그 위에 선 짐승, 아니 괴물은 네 다리 모두 굳건함에도 불안정했다. 난사는 숨을 죽이고 주의를 끌지 않을 거리에서 검은 짐승을 응시했다. 날개는 바싹 말라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고 몸뚱어리는 불길한 검푸른 빛이었다. 썩어가는 두 눈이 먹이를 찾듯이 사위를 헤집었다. 그것은 서 있는 시체, 탁기로 뭉친 살덩어리였다. 늑대구릉에 발을 딛자마자 겁에 질린 사내가 말한 것처럼, 이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앙시족 전사들을 도와 거꾸러뜨렸던 신시의 그림자.
사난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기척이 날 뻔했다. 울컥하고 핏덩어리 같은 것이 치민다. 그녀는 눈을 감고 호흡을 세었다. 목적 없는 감정을 쏟아낼 곳이 없었으므로, 속에서 삭여야 했다. 탁기로 이루어진 환상이나 다름없는 괴물에게 으레 품을 법한 적대감, 측은함 외의 무언가가 있었다. 탁기에 오염된 것들을 베어 넘길 때에는 일말의 자비도, 조금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투지의 밑바닥까지 긁어모아도 부족할 판에 망설임이라니 당치도 않았다. 일 년 전이었다면 되레 급하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 생긴 지금은 여유라는 것을 안다. 난사는 서서히 눈을 뜨며 등 뒤로 손을 올렸다. 그 때였다.
하얀 날개를 보았다.
구름 몇 점 떠 있는 맑은 하늘에서 곧게 뻗어 내린 햇빛이 괴물의 날개에 반사된 빛이었다. 그러나 난사는 숨을 들이켰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듯 조각조각 기억이 되살아났다. 순백한 몸체, 죽어 움직이는 병사들을 찢던 빛살 같던 발톱. 새하얀 신시. 그녀는 그의 도움을 받던 순간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처음엔 의식적인 외면이었다는 것도, 난사는 기억해 냈다. 모른 척 했던 것조차 잊었던 숱한 것들 중에 하나였다. 숨쉬기도 힘들 만큼 탁기가 무겁게 깔려 있던 고도시에서 하얗게 빛나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었다. 하얀 신시는.
그러나 햇빛 아래 선 건 흑신시였다. 이전에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두려움이나 긴장감은 이제 자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난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마침내 뽑아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치밀어 오르던 건 안타까움이었다. 모든 것이 탁기에서 시작하였다. 신시의 저러한 모습도, 그녀의 여정도, 진서연의 복수도 모두. 탁기에 물든 생명은 구할 도리가 없다. 난사는 땅을 박찼다. 위협을 감지한 흑신시의 시선이 제게 꽂히는 것을 온몸으로 통감하며 번개를 내리 꽂았다.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기억 속 영수의 울음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흑신시의 시신이 검게 부스러졌다. 탁기에 물든 것은 검기만 했다. 가볍게 들판을 어루만지는 바람이 재를 날려 올렸다.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 해가 뿌리는 주홍색 빛이 핏빛이다. 난사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 자취를 쫓다가 갈 길을 잃었다.
흑신시는 내일도 이곳에, 귀문관에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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