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앤 소울의 자캐를 기반으로 한 밀레시안이기 때문에 일부 설정이 블레이드 앤 소울의 막내를 따릅니다.

 

 

 

  이 에린은 제 세상이 아니다. 사난사는 무척 오랫동안 그러한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고서 밀레시안의 삶을 살았다. 그 뿐이었다면 평범한 축이었을 것이다. 밀레시안 중에도 에린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겉도는 이는 더러 있었으므로. 그러나 난사에게 제 세상이 아닌 에린이라는 표현은 그 뿐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늘 돌아가고 싶어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 한참이나 헤메었었다. 여신의 목소리에 따른 것도 언젠가 그녀가 돌려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었기 때문이다.

 

  사난사는 에린에 흘러들어오기 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갖고 있었다.

 

  모든 기억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어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이 무엇인지 곧바로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일곱 살 무렵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분질러먹은 일 따위는 누구라도 기억할 수 있다. 그녀의 기억은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여신을 구출하고 빛의 기사가 되어 용의 감응자가 되고 반신의 힘마저 얻어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라는 칭호까지 얻었지만, 그 모든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열망만이 커져갔다. 초조했다.

 

  스승님, 하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던 어린 제자들. 그 해사한 얼굴들 위로 그을음과 피가 한 바가지씩 퍼부어지는 꿈을 꾸고 소스라쳐 잠을 깨는 날들이 더러 있었다. 점차 잠을 줄이던 그녀는 제 몸이 수면이나 섭식 없이도 멀쩡하게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먹고 잠들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길을 찾아봐도 여전히 제자리였다. 여신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실감해버리고 만 것이다. 제 두 발이 이 에린 땅에 못박혀 있음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아주 처절하게. 가장 위대한 밀레시안이라는 칭호와 반신의 힘, 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버린 여신과 제게 죽음을 요구하던 드루이드의 마지막 말이 그녀를 얽어매고 있었다. 깨달은 것은 추락하던 그 때였다. 그녀와 검을 얽던 사내의 결말이었다. 나란히 추락했으나 땅에 내려선 것은 그녀뿐. 옆의 사람들도 잊고서, 난사는 무릎을 꿇었다. 보랏빛을 띈 검은 꽃줄기 환상이 그녀를 휘감아 땅에 파묻었다. , 난사는 울음처럼 웃었다. 절망만 안겨주던 세계에 정을 붙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다, 그들이 왔다.

 

  이름만 들어왔던 절대신을 따르는 자들이라 했다. 정갈하고 엄격한 기사들이었다. 다만 앳된 얼굴의 소년은 그녀를 찬양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만한 일을, 정말 그녀가 했던가? 부풀려졌을 것이 틀림 없는 그 이야기에, 난사는 도리어 겁을 집어먹었다. 제게 기대를 거는 수 쌍의 눈동자를 피하고만 싶었다. 따스하게 건네어지는 말씨마저 의심스러워, 오히려 저를 의심하던 여기사가 차라리 마음 편했다. 그들도 제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마 하고 대답하는 것은 이제 타성이었다.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금발을 지닌 기사는 그런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할일이나 주었으면 했다. 움직이지도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금이 간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다. 자칫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기사의 말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렇게 부수어지면,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이 지긋지긋한 삶도 끝나지 않을까. 이제라도 제자들 곁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샘솟았다. 저 하나만으로 끝날 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에린은 또다시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제 안의 반신이 어떤 변수일지 알 수 없었으므로 죽어서는 안된다 했다.

 

  회한의 동굴로 향하는 발걸음은 느리고 무거웠다. 이 균열을 독이라 했던가. 난사는 그녀를 어떻게든 북돋워보려던 소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산을 올랐다. 동굴 앞에는 뭔가 반짝이는 것들이 한가득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어느것도 난사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난사는 홀린 듯이 걸어 검게 입을 벌린 구멍으로 발을 내딛었다. 깊게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사부님!"

 

  어린 여자 아이였다. 검은 머리 양갈래로 곱게 묶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눈물 탓일까, 아니면 그녀의 기억이 많이 흐려진 탓일까.

 

"언제 오세요?"

"……곧 간단다."

 

  와아! 외마디 탄성과 함께 아이는 사라졌다. 난사는 사방으로 고개를 휘돌렸다. 산발한 머리채가 사방으로 날렸다. 어디, 어디에 있니. 크게 불러보려 숨을 들이키고 나서야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내 어찌 네 이름을 잊었단 말이냐.

 

  이미 금이 가 있는 그릇은 밀려 넘어지자 산산이 부서저 깨졌다. 균열은 그 자체로 독이 아니다. 그 갈라진 틈으로 독이 새어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지.

 

  깨진 그릇에서 독이 흘러넘친다.

 

  등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었다. 등을,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 땅에 피웅덩이가 고인다. 제 손발이 끝부터 탁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난사는 기껍게 내려다보았다.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무언가 끝이 났다. 오직 그것만을 알았다. 동굴이 내려앉은 잔해에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햇빛을 가렸다.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 사난사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처음? 아니다. 난사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발 아래 더운 김 피어오르는 웅덩이가 찰박였다.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가 방해된다 생각하던 차에 바람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난사는 무언가 제 등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시야 끝에 노란 것이 스치운다. 난사는 고개를 돌렸다. 날개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제 등에 뿌리를 내리고 돋아나 있었다. 손을 뻗어 더듬어보았다. 이제 막 돋아나 피를 흠뻑 뒤집어 쓴 날개는 흙먼지를 갈라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문득, 어떠한 예감에 전율이 일었다.

 

"사난……!"

"……! ……까이 가지……!"

 

  이젠 목소리의 주인이 잘 보인다. 난사는 두 남녀를 잠시 바라만 보았다. 역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기야, 내 아이들의 이름도 잊었는데 당신들 이름이 기억날 리가 없지. 난사는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등에서 흐르는 피는 멎을 줄을 모른다. 피로 된 연못은 커지기만 했다.

 

"……, 이게…… …… 도대……!"

"……!"

"……!"

 

  하얗게 질린 소년이 자꾸만 무언가를 외쳐댔으나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소한 문제였다. 난사는 귀를 닫고 날개를 펼쳤다. 다시금 전율이 인다. 태어날 때부터 달고 있었던 것 같다.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말로 다 못할 해방감이었다. 발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은 피가 아니라 저를 이 땅에 묶던 검은 덩쿨이다. 난사는 크게 한 번 날갯짓을 했다. 몸이 솟구친다. 아니, 떨어진다.

 

  사난사는 하늘로 추락했다.

 

 

 

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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