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조님이 썰 같이 풀어줌 시연님이 카즈피네 던져줌 0 0)9

 

 

 

  시체에서 솟아나는 제바흐와는 달리 기르가쉬는 스스로의 몸을 이계의 신에게 바친 산 사람들이 화한 모습이다. 피네는 그 참담한 모습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측은한 것과 별개로 그녀의, 그녀 신의 적이었다. 그런 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르가쉬나 제바흐 같은 이계신에 의한 괴물들은 보는 것조차 괴로웠었다. 마음이 전부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환청 같은 것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피네는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뒤늦게 등 뒤에 있을 조원들이 떠올랐다. 저 두 명은 지금 그 누구보다 저를 의지하고 있을 터다.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표정을 가다듬고 뒤로 돌았다. 지친, 그러나 사명감에 가득 찬 두 쌍의 눈이 저를 의지한다. 그 눈들은 동시에 그녀 어깨 너머에 자리한 그들의 적 또한 보고 있다. 피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자. 잘 될 거야."

 

  그것은 축사와도 같은 응원이다. 피네는 작전에 임하기 전이면 늘 몇 마디 말로 조원들을 북돋우곤 했다. 잘 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잘 되게 할 것이라는 다짐. 그녀의 조원들은 그녀처럼 상냥한 이들 뿐이었다. 마주 웃고는 미리 짜여진 작전대로 제 위치로 향한다. 이제는 그들의 뒷모습이 눈에 담긴다. 가슴의 응어리가 해소되고서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불쑥불쑥 눈앞에 모습을 들이밀었다. 이제는 선명한 색으로 기억될 것들. 피네는 그 모습을 되새기고 옆을 돌아보았다.

 

"가자, 카즈윈."

"그래."

 

  인원이 부족한 탓이다. 둘 이상의 기르가쉬가 등장하는 것은 상정한 범위 내의 돌발상황이었지만, 아르후안 조가 아발론 게이트에 발이 묶인 시국에 두 개의 조를 한 전투에 투입할 여력은 없었다. 견습기사들로 이루어진 지원부대가 오기를 바라기도 힘든 상황에 난전까지 각오했을 때, 카즈윈이 나타났다. 혼자였다. 별다른 말은 않았지만 헤루인의 조원들에게는 또다시 예의 그 온갖 상황을 가정한 빽빽한 지령서를 던져주고 왔을 터다.

 

  피네는 문득 생각난것처럼 작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아튼 시미니께 기도한 줄 알았지 뭐야."

"뭐?"

"카즈윈이 와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터무니없는 예감인 줄 알았는데, 기도였나 하고."

 

  그가 제 옆얼굴을 보는 것을 알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것도 같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전이 코앞이으므로. 말은 더 필요 없었다. 피네가 완드를 들어올린 것과 동시에 카즈윈이 땅을 박찼다. 그것이 신호였다. 약속된 곳에서 두 사람의 신성력이 발현되고, 괴물의 울음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진흙에 파묻힌 울음소리.

 

 

 

  적의 빈틈을 공격할 검은 둘인데, 정작 그 빈틈을 만들 방패와 사슬이 하나뿐이었다. 선택지라고는 속도전밖에 없다. 각자 역할을 잘 알고 있는데다 피네와 그 조원들의 호흡은 말할 것도 없었고, 카즈윈 또한 그들에게 맞추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으므로 돌발상황만 잘 대처한다면 큰 피해 없이 끝날 싸움이었다. 저 괴물들의 뒤엔 이제 선지자도 없었으므로.

 

  그러나 대처 못할 상황이라는 건 생기기 마련이었다. 휘두른 검을 거둬들이는 조원의 머리를 향해 기르가쉬의 칼이 날아들었다. 피네는 완드를 뻗었다. 푸른 번개가 내리꽂힌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제 오른쪽 사각에서 날아드는 다른 하나의 손톱을 보지 못했다.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너무 가까웠다. 왼손의 방패가 너무 멀다. 이건 맞는다고, 머리가 아닌 몸이 예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세상이 뒤집혔다.

 

  피네의 날아간 머리는 땅을 한바퀴 굴러 진흙을 한 움큼 집어먹었다. 뱉어내고나서, 피네는 제 머리가 무사히 목에 붙어있는 것을 알았다. 고통도 머리를 맞은 충격이 아니라 땅에 구른 충격으로 인한 것 뿐이다. 어째서?

 

"피네!"

 

  급작스러운 의문과는 달리 눈은 착실히 전장상황을 보고 있었다. 카즈윈이 뭘 원하고 제 이름을 불렀는지, 피네는 마치 본능처럼 깨달았다. 높이 쳐든 완드, 뿜어낸 신성력이 만들어낸 방패가 다시 한 번 내리꽂히는 기르가쉬의 손톱을 튕겨냈다. 몇 번이고 있던 기회였다. 반짝이는 사슬이 괴물을 묶은 것과 동시에 거대한 검이 그를 향해 내리꽂혔다. 의도된 바대로 남은 또 하나의 기르가쉬도 검 끝이 닿는 곳에 서 있는데, 그 건너편에서 또 하나의 검이 솟았다. 마저 내리꽂혔다.

 

  그 두 번의 지진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괴물은 오간 데가 없고 추락한 진흙투성이 시체가 두 구. 거대한 언덕같은 그 형상도 곧 먼지로 스러질 터다. 끝난 것이 분명한데도 알 수 없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게 뭘까. 불안할 땐 그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러나 카즈윈을 찾기도 전에 걱정스러운 외침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조장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마지막엔 좀 위험했지."

"하지만 피가……!"

 

  피. 피네는 이제 습관이나 다름 없는 웃는 얼굴도 유지하지 못하고 홱 뒤로 돌았다. 높이 올려 묶은 제 머리채가 시야 끝을 스쳤다. 알던 색이 아니다. 피다.

 

"카즈윈!"

 

  그는 꿇어앉아 있었다. 고개 숙인 옆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자잘한 생채기, 그 옆에 떨어뜨린 것처럼 널부러진 검 두 자루를 알아보았다. 허리께를 감싸쥔 손. 피. 그의 푸른 옷은 이미 붉다 못해 검었다. 바지까지 검게 물들어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에게 가는 열 몇 걸음이 세상 어느 길보다 멀었다.

 

"괜찮아."

"이게 어디가 괜찮아!"

 

  피네는 건틀렛을 벗어 내던졌다. 어깨의 갑옷과 벨트를 끌르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제 갑옷을 입고 벗는 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그런데도 자꾸만 손이 헛짓을 했다. 억울한 마음에 치미는 것을 애써 삼키는데 덥썩 손을 잡혔다. 피 묻은 손이다.

 

"피네."

 

  얼굴에 맺힌 땀이 전투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벌써부터 쇼크가 오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 그의 얼굴 이곳저곳을 헤메며 다른 징후를 찾는 두 녹색 눈동자를, 카즈윈은 한 번 더 불러세웠다. 겨우 그를 보게 되었다.

 

"피네."

"……응."

"천천히 해. 괜찮아."

"……카……."

"괜찮아."

 

  마침 도착한 다른 조원이 붕대를 내밀었다. 피네는 그 붕대를 받아들고서야 덜덜 떨던 손을 진정시켰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조장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 피에 놀라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피네는 제 손을 아직 놓지 않은 카즈윈의 손을 꾹 쥐었다. 때를 기다리던 조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여관이라도 잡아야 할까요?"

"……아니. 민가는 소문이 퍼지기 쉬워. 라이미라크 교단으로 가줘. 도와줄 거야."

 

  두 조원 모두 마을로 떠났다. 한 사람은 교단으로, 다른 한 사람은 모자랄 게 분명한 구급물품을 사오겠다 했다. 막 전투를 치른 뒤에 쓸데없는 접촉은 피하는 게 옳다고, 피네 스스로도 생각은 했지만 무시했다. 격한 전투 끝에 남은 마나도 얼마 없어 크게 회복마법을 걸기도 여의치 않았다.

 

  카즈윈은 앉은 채였다. 허리에 붕대를 감으려면 그 편이 나았다. 갑옷은 이미 벗었지만 셔츠는 아직이었다. 손을 떼는 순간 피가 뿜어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단추를 끌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피네는 말도 없이 손을 뻗었다. 조금 전엔 제 손을 잡았던 손을 잡아 만류하고 칼을 들었다. 어차피 입지도 못할 옷이니 자르는 게 나았다. 그의 손이 알고 있던 것보다 차가운 건 곧 밤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애써 생각을 다잡았다.

 

"……할게. 준비 됐어?"

"그래."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다. 굳이 들려주는 대답이 손을 잡아 누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피네는 세 번 접은 깨끗한 천을 들어 그가 막고 있는 왼손 가까이에 댔다. 속삭이듯이 하나, 둘. 셋까지는 필요 없었다. 가장 적은 피를 흘리며 가장 어려운 작업이 끝났다. 피네는 붉은 점이 나타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붕대를 펼쳐들었다.

 

"감을게."

"응."

 

  나타나기 시작한 붉은 점들 위에 다시 흰 붕대를 감는다. 허리에 붕대를 감는데 혼자 하려니 숫제 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한 바퀴 돌려 감는데 그의 어깨에 볼이 스쳤다. 축축한데다 뜨겁다. 전투 후의 열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소문이고 뭐고 의사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카즈윈, 솔직히 말해. 어지러워?"

"……조금은."

"사제들이 빨리 와줘야 할 텐데."

 

  처치를 끝내고 피네는 두 손을 모았다. 남은 마나로는 한 번... 전부 끌어모아 세 번이 전부였다. 피네는 반짝이는 빛을 붕대 위에 끼얹고 나서야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진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지났지……. 더 늦으려나."

"곧 오겠지."

"하하, 응……. 그렇겠지……."

 

  겨우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눈물이 없을 뿐 울음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조원 중 누구, 아니 다른 누구라도 좋았다. 한 사람만 더 옆에 있어준다면 괜찮았을 텐데. 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울고 싶을 땐 울어도 된다던 그의 말이 이럴 때 생각나서는 안되는 건데.

 

  까슬한 손이 무릎 위 제 손에 얹혔다. 이미 밤이 내려 까만 세상에 그의 회색눈이 선명한 빛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제 마음에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스스로도 참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다. 그는 그녀의 구원이다. 큰 것이던 작은 것이던, 그는 늘 그녀를 진흙탕에서 빼내어온다. 피네는 카즈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플까 두려워 차마 끌어안지는 못하고 주먹 쥔 손으로 끌어안았다. 매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즈윈은 피 말라붙은 손을 피네의 등에 얹었다. 그녀의 조원들이 조금만 더 늦기를 바랐다. 피네가 조금이라도 더 울 수 있도록.

 

 

 

Posted by 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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