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_03

기타 2016. 10. 6. 01:00

 

 

 

  “아저씨, 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

 

  달그락거리던 식기를 내버려두고 돌아보자, 그 애는 이제 막 비운 물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 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왜 우유 서비스도 안 주는데요?”

  “……아주 등골까지 빼먹어라.”

  “……그럼 좀 덜 맵게 하든가.”

 

  소심하게 중얼거리고, 그 애는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맵다고 투덜거리는 것치고는 잘 먹는 편이었다. 정말 못 먹는 애들은 아예 맵지 않은 종류로 내준다.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매운 음식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누가 퍼뜨린 걸까. 그 애는 이따금 다른 것 일절 없이 떡볶이 한 그릇만 앞에 두고 전투적으로 땀을 흘려가며 입에 밀어 넣곤 했다. 그건 어떻게 봐도 화풀이 같은 것이라 저절로 눈길이 갔다. 애시당초 매 저녁식사를 분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시점에서 말 한두 마디 트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라는 작자들은 뭘 하고 있는 건지. 어른들이 쳐놓은 울타리가 허술한 아이들은 티가 났다. 그 중에서도 그 애는 유별났다. 이따금 주말 끼니가 걱정될 정도로.

 

  “……왜요?”

 

  시선을 느낀 아이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물어봐도 될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길래 메뉴가 그거야. 자주 시키던 볶음밥은 어쩌고.

 

  “……뭔데요.”

 

  내성적인 애들은 겁을 집어먹기도 쉽다. 워낙에 퉁명스러운 인상이라, 말을 시작할 때 이름을 부르는 버릇을 붙인지 꽤 오래되었다. 입을 연다.

  뭐였더라, 네 이름.

 

 

 

  “아저씨?”

  “……?”

  “아저씨, 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아저씨는…… 마드리나를 어떻게 생각했어요……?”

 

  아. 마드리나.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

 

  “글쎄. 뭐라고 생각했느냐니……. 그냥 너 그러고 놀던 거 아니었어?”

  “파하……. 뭐야. 진짜 별 생각 없으셨나보네요?”

 

  실망인지 안심인지, 그 둘도 아닌 다른 무언가인지 잘 몰랐다. 표정 읽는 재주는 없다. 다만 그것이 그 애의 중요한 무언가였다는 것만은 안다. 딱히 남에게는 내보이고 싶지 않은 무언가. 다가가는 게 서투르니 적당히 모르는 척 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선, 안 되었던가보다.

 

  무언가 재생된다. 되풀이된다. 간밤에 꾼 꿈을 되새김질하는 것 같은 몽롱함. 흐릿함. 잊고 싶었던 건지 사는 게 빡빡해 저절로 닳아 없어진 건지, 다 헤진 기억이 도로 치고 올라와 마음을 어지럽히던 것처럼. 유령에게 허락된 것이라곤 보고 듣는 것뿐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에, 반쪽짜리 시야에 칼로 새기는 것처럼 깎여나가는 풍경. 아이. . . . 이내 사라지는.

 

  이건 현실이 아니지. 그렇지? 내가 헛것을 본 거야. 피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데 사실일 리가 없어. 너는 볼 일이 없었겠지만 피웅덩이가 그만큼 크게 생기면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피 냄새가 짙거든. 나도 살면서 딱 한 번 봤지만, 현실감이 없어질 만큼 짙은 냄새가…….

 

  ……너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잖아.

 

  어른이 쳐놓은 울타리가 허술한 아이들은 티가 났다. 일평생 겪어온 것의 자취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식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다 주저하게 되는 나날이 반복된다. 내 주제에, 내 주제에. 하지만 애들을 어른이 안 지키면 누가 지키지.

 

  다시 새겨진다. . . 망설임 없이 한 번에. 딱 한 마디, 그것 하나가 벽을 긁는 나이프 소리와 함께 되풀이된다. 이미 타서 없는 뇌에 새겨지는 것 같은 환청. 환청인가? 되풀이 된다.

 

  “아무도 평범한 아이에게는 신경 써주지 않아…….”

 

  그날,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곤 물병 하나를 더 꺼내다 준 것뿐이다. 말없이 고개만 한 번 까딱 숙이던 네 앞에 앉았어야 했나. 혹시 무언가의 신호였나. 물어봐달라는. 나 좀 신경써달라는. 나 좀 지켜달라는. 나는 그것 하나 해주지 못한 건가.

 

  그 칼은 내가, 찔렀나.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라팔모 1  (0) 2018.08.21
COS_04  (0) 2016.10.12
COS_02  (0) 2016.09.29
맹세의 새벽 02/조사로그1  (0) 2016.07.29
맹세의 새벽]01  (0) 2016.07.27
Posted by 마바
,

COS_02

기타 2016. 9. 29. 02:01

 

 

 

해가 갈수록 희미해지던 기억이 있다.

 

너덜너덜한 옷, 말라붙은 핏자국과 부러진 팔다리, 엉망이 된 얼굴에서 찾아지던 낯익은 이목구비 따위의 것들. 몸이 없는 지금, 피부를 타고 흐르던 게 한기였던지, 아니면 열기였던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차가운 게 어떤 느낌이었더라. 뜨거운 건? 잃은 것에 대한 기억은 애써 붙들지 않으면 빠르게 그를 떠났다. 자잘한 것에 미련 둘 여력이 없었다. 그는 제 딴엔 많은 것을 흘려보내고 잊었다.

 

그러나 기억이란 게 실은, 주인을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 저 깊은 곳, 뱃속 어딘가로 흘러내려가 지하수처럼 검게 고이는 모양이다. 너덜너덜한 옷, 말라붙은 핏자국이나 부러진 팔다리, 반쯤 없어진 소년의 얼굴을 마주하자 기억이 우물물처럼 솟아났다. 현재에 과거가 덧씌인다.

 

남자는 입술 안쪽을 가볍게 물었다. 물었다고 생각했다. 짓씹을 입술 같은 건 없어진지 오래였으므로, 그 행위는 그저 의미만이 공허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뭘까. 몸도 없는데, 목소리는 어떻게 내는 것이며 오래 묵혀둔 썩은 과거는 욕설과 함께 치밀어오르지 못해 안달일까.

 

남자는 입안에 고인 험한 말들을 삼키고 대신 이름을 되뇌었다. 김시현. 김시현. 시현이. 이건 시현이지. 체대 갈 거라던, 폰카를 더럽게도 못 찍던. 이 꼴로 돌아왔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 않고 말 걸어주던. 아이.

 

"자기 자신도 생각해요, 형은."

 

그 말이 더 속을 쓰리게 했다.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애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내년이면 성인이었는데……."

 

……빌어먹을. 겨우 열아홉이었어. 모순을 들킨 과거가 슬금슬금 물러나, 다시 지하로 스며든다. 열아홉 소년의 침통한 표정이 속을 끓인다. 열아홉. 나이가 전부는 아니지만 애는 애다. 아이는 어른에게 보호받아 마땅하다. 어른은,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지켜야 했다. 빌어먹을.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한 못난 어른이 할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공허한 사죄뿐이다. 아무 소용도, 보상도 되지 못하는 고작 그 한 마디가 다였다. 용서받고 싶은 건가, 나는. 용서받고 싶은 걸까.

 

받고 싶은 건가.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COS_04  (0) 2016.10.12
COS_03  (0) 2016.10.06
맹세의 새벽 02/조사로그1  (0) 2016.07.29
맹세의 새벽]01  (0) 2016.07.27
[맹세의 새벽] 베레니체 로건  (0) 2016.07.16
Posted by 마바
,

  눈을 뜨게 하는 것들엔 여러 가지가 있다. 시간을 알리는 햇빛, 키를 쑥쑥 크게 한다는 떨어지는 악몽이나, 흔들어 깨우는 엄마의 거친 손길이라든가……. 있었다, 그런 것들이. 이젠 저를 찾아오지 않는 것들이. 베레니체는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밖이 왜 이리 조용해.

 

  별당 밖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자나? 그럴 리가 없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눈에 쪽지가 띈다. 8시까지 개별 조사.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

 

  마법사에게는 갑옷도, 무거운 칼이나 방패도 필요가 없다. 아드리아나가 말하길, 신체를 함께 단련한 자도 간혹 있다고는 했지만 그건 절대 저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이었다. 뼈마디를 주무르며 밖으로 나섰다. 탁해진 호수가, 재로 흔적만 남은 풀 따위가 눈에 밟혔다. 다정한 건 당신이잖아요, 로건. 그러게요. 난 내가 무섭도록 가차없는 계집애인 줄로만 알았는데.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뛰쳐나오긴 했는데, 어딜 가야 한담. 무너진 성벽이 떠올라 방향을 잡았다. 밟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2만 년을 삭아온 도시였다. 그러고도 이만치 형체를 유지하는 게 조금, 부러웠다. 발에 채인 돌멩이 하나를 던지고 놀며 걸었다. 얘, 너도 2만년을 삭아 이리 작아졌니. 사람 아닌 것은 그렇게 오래 문드러져도 이렇게 남는구나.

 

  셩벽에 다다랐다. 아, 이렇게 무너졌구나. 꽤 크네……. 이런 뿔에 받혔다간, 저나 칼리아는 당장에 허리께가 찢길지도 몰라. 베레니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상 정도야 각오한 터였지만 싫은 건 별개였다. 라브아르데를 졸라야지……. 말은 새침히 내뱉으면서도 챙기지 못해 안달인 그가 참 웃기고 귀여웠다. 8천 해를 살았다면서도 아이일까. 하기야, 열여덟이면 어른으로 쳐주는 인간들 중에서도 29살 먹은 애기가 있는 걸. 그가 힘들어보이면 타 할아버지를 졸라야지……. 빨간약 정도는 줄 거야.

 

  자칫하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 살피던 것을 그만두고 뒤돌았다. 밤에 잘 잔 것이 도움이 됐는지 몸이 한결 가뿐해. 오늘 밤에도 불러달라 청할까……. 꿈없이, 뒤척임없이 깊은 잠을. 베레니체는 정확히 기억나는 한 소절만 돌림노래처럼 흥얼거렸다. 가사도 없이 그저 콧노래처럼. 흥얼흥얼.

 

  눈을 뜨게하는 것들엔 여러 가지가 있다. 있었다. 이제는…….

 

 

-

공미포 864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COS_03  (0) 2016.10.06
COS_02  (0) 2016.09.29
맹세의 새벽]01  (0) 2016.07.27
[맹세의 새벽] 베레니체 로건  (0) 2016.07.16
맹세의새벽  (0) 2016.07.03
Posted by 마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