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
달그락거리던 식기를 내버려두고 돌아보자, 그 애는 이제 막 비운 물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 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왜 우유 서비스도 안 주는데요?”
“……아주 등골까지 빼먹어라.”
“……그럼 좀 덜 맵게 하든가.”
소심하게 중얼거리고, 그 애는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맵다고 투덜거리는 것치고는 잘 먹는 편이었다. 정말 못 먹는 애들은 아예 맵지 않은 종류로 내준다.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매운 음식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누가 퍼뜨린 걸까. 그 애는 이따금 다른 것 일절 없이 떡볶이 한 그릇만 앞에 두고 전투적으로 땀을 흘려가며 입에 밀어 넣곤 했다. 그건 어떻게 봐도 화풀이 같은 것이라 저절로 눈길이 갔다. 애시당초 매 저녁식사를 분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시점에서 말 한두 마디 트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라는 작자들은 뭘 하고 있는 건지. 어른들이 쳐놓은 울타리가 허술한 아이들은 티가 났다. 그 중에서도 그 애는 유별났다. 이따금 주말 끼니가 걱정될 정도로.
“……왜요?”
시선을 느낀 아이가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물어봐도 될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길래 메뉴가 그거야. 자주 시키던 볶음밥은 어쩌고.
“……뭔데요.”
내성적인 애들은 겁을 집어먹기도 쉽다. 워낙에 퉁명스러운 인상이라, 말을 시작할 때 이름을 부르는 버릇을 붙인지 꽤 오래되었다. 입을 연다.
뭐였더라, 네 이름.
“아저씨?”
“……어?”
“아저씨, 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아저씨는…… 마드리나를 어떻게 생각했어요……?”
아. 마드리나.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
“글쎄. 뭐라고 생각했느냐니……. 그냥 너 그러고 놀던 거 아니었어?”
“파하……. 뭐야. 진짜 별 생각 없으셨나보네요?”
실망인지 안심인지, 그 둘도 아닌 다른 무언가인지 잘 몰랐다. 표정 읽는 재주는 없다. 다만 그것이 그 애의 중요한 무언가였다는 것만은 안다. 딱히 남에게는 내보이고 싶지 않은 무언가. 다가가는 게 서투르니 적당히 모르는 척 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선, 안 되었던가보다.
무언가 재생된다. 되풀이된다. 간밤에 꾼 꿈을 되새김질하는 것 같은 몽롱함. 흐릿함. 잊고 싶었던 건지 사는 게 빡빡해 저절로 닳아 없어진 건지, 다 헤진 기억이 도로 치고 올라와 마음을 어지럽히던 것처럼. 유령에게 허락된 것이라곤 보고 듣는 것뿐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에, 반쪽짜리 시야에 칼로 새기는 것처럼 깎여나가는 풍경. 아이. 피. 칼. 너. 이내 사라지는.
이건 현실이 아니지. 그렇지? 내가 헛것을 본 거야. 피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데 사실일 리가 없어. 너는 볼 일이 없었겠지만 피웅덩이가 그만큼 크게 생기면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피 냄새가 짙거든. 나도 살면서 딱 한 번 봤지만, 현실감이 없어질 만큼 짙은 냄새가…….
……너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잖아.
어른이 쳐놓은 울타리가 허술한 아이들은 티가 났다. 일평생 겪어온 것의 자취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식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다 주저하게 되는 나날이 반복된다. 내 주제에, 내 주제에. 하지만 애들을 어른이 안 지키면 누가 지키지.
다시 새겨진다. 피. 칼. 망설임 없이 한 번에. 딱 한 마디, 그것 하나가 벽을 긁는 나이프 소리와 함께 되풀이된다. 이미 타서 없는 뇌에 새겨지는 것 같은 환청. 환청인가? 되풀이 된다.
“아무도 평범한 아이에게는 신경 써주지 않아…….”
그날,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곤 물병 하나를 더 꺼내다 준 것뿐이다. 말없이 고개만 한 번 까딱 숙이던 네 앞에 앉았어야 했나. 혹시 무언가의 신호였나. 물어봐달라는. 나 좀 신경써달라는. 나 좀 지켜달라는. 나는 그것 하나 해주지 못한 건가.
그 칼은 내가, 찔렀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