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에린에서 오는 문], 스텝부스에서 판매되었던 레이스칼님(@mabi_skarl)님의 신간에 드린 축전입니다.
좋은 회지 감사드립니다 ㅠㅡ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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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것... 그 전의 시점... 얘네 현대 환생au 진짜 열심히 덕질햇구만... 합작에 제출했던 글
"어쩔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봐주자고?"
"제가 한다니까요?"
반쯤 열렸던 자그마한 입술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물어졌다. 그 자리의 누구라도 지금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을 터다. 밉보이려 작정한 걸까 싶으리만치 도전적인 태도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한테 피해 안 가게 할게요."
"……그 말, 기억해 두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의자 끄는 소리가 학관 로비를 울렸다. 일부러 그랬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큰 소리로 한 순간 주목을 끌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익숙하다는 양 다시 고개를 돌려 자기네들 할 일에 열중했다. 소문을 좋아하는 할일 없는 몇이 그 둘을 힐끗거렸지만 그 이상의 소란은 없었다. 여자는 로비 한 구석의 컴퓨터를, 남자는 학교에서 대여한 것이 틀림없는 노트북을 붙들고 말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관심은 곧 수그러들었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타자를 두드리던 여자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자판 위에서 주먹 쥔 손이 되도 않는 오타를 냈다. 백스페이스를 누르다가, 여자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참고 있는 듯이 앙다문 입술과 떨리는 눈동자가 남자의 앉은 등을 향한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다가, 여자는 숨을 들이켰다. 한숨처럼 내뱉은 숨이 파르르 떨렸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하염없이 백스페이스를 누른다. 본문이 하얗게 비어버릴 때까지.
파르모의 삶은 두 개였다. 언제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쌓여가는 기억과는 또 다른 기억이 이따금 잠든 그녀를 찾아들었다. 그것은 선명하기도, 흐릿하기도 했고 과거를 추억하는 회상 같은 것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엔 그 둘을 자주 혼동해 주변 사람들이 애를 먹기도 했었다. 있지도 않은 실프는 어디 있느냐며 찾아 나서지를 않나, 겨우겨우 구해온 강아지도 실프가 아니라 싫다며 목 놓아 울어버리지를 않나. 당황한 어른들은 아이의 상상력이라 치부하며 때론 그녀를 달래고, 때론 흘려들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무시하다가 이내 피해버렸다. 파르모는 그것이 자신의 전생이라 확신했다. 다만,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나라와 이름, 전쟁이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다른 것에 집중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손엔 일류 대학 입학 허가서가 들려 있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이젠 알았으므로 지낼 만했다. 처음 1여 년은 그랬다는 얘기다. 그 다음 해, 올해 초 그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아수라.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이름만 같을 것이라고, 이름만 같을 그 사람을 목도하고 이번에야말로 그를, 이전의 생을 지금의 삶으로부터 잘라내겠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개강식에서 마주친 그 남자는 밤마다 그녀를 찾아오던 다른 기억, 그 속의 그 남자였다. 얼굴이 흡사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생김새나 이름, 목소리. 아니, 설사 그 모두가 달랐다고 해도 파르모는 알았을 것이다. 파르모는 처음 그를 기억해 냈던 밤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오던 꿈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땀으로 온 침대를 적시고 일어나 앉아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었다. 그 남자가 각인되다시피 한 그녀가 확신하건대, 둘은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 삶과는 경우가 달랐다. 파르모는 이제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이렇게까지 해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뭐에요?”
시퍼렇게 날이 선 말에 베인 건 다행히 아수라뿐이었다. 밤늦게까지 본관 로비에 남아있는 건 둘 뿐이었으므로. 파르모는 무릎에 얹어둔 가방을 뚫어져라 보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남자는 차마 볼 수 없었다. 생각이 깊어졌다. 이렇게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숨이 떨릴 것 같은데 그 눈을 마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공만 같지 않았더라면, 그 안에서 한 조로 묶이지만 않았더라면 그 어떤 연락수단도 만들지 않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마주보고 앉을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차라리 그의 이름을 들었던 그 순간 휴학이라도 신청할 것을.
“묻…….”
아수라가 운을 떼자마자 파르모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내쳐진 말 뒤로 정적이 이어졌다. 파르모는 당장에라도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게 싫으면 도망치지 그래.”
제 생각을 꿰뚫어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지적질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파르모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도망치면 그는 가차 없이 조원 평가지에 0을 그려 넣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동기는 어쩌다 일정이 어긋나 단 한 번뿐이었던 조별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단 이유로 크게 점수를 깎일 것이 분명했다. 그 친구 때문에 그 과제를 버리지도 못하긴 했지만,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파르모와 아수라 사이에 끼어서도 주제 선정이며 자료조사며 발표며 모두 열심히 한 친구였다. 할 말이 있으니 남으라고,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오늘 아예 안 오는 모양이라고 은근한 압박을 가하기나 하는 그의 막돼먹은 성격 탓에 손해 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은 마주볼 수가 없었다.
“도망가지 말라고 못 박았잖아요, 당신이.”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파르모는 테이블 위에 얹어둔 그의 손에 의식적으로 집중했다. 선이 굵고 어딘지 모르게 손마디가 거칠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파르모는 그 이유를 생각하려 했다.
“……미안하군.”
말보다도 그 어조에 퍼뜩 놀라, 파르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굳었다. 아차 싶었다. 냉정하고 차갑던,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던 그 눈만큼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저런 눈빛이 아니었다.
“다음 학기는 휴학할 거라 들었다만.”
“……네.”
“하지 마라.”
명령하듯 단호한 어조였다. 아까 그녀를 놀라게 했던, 씁쓸하게까지 느껴지던 말은 착각이었을까. 반발심이 고개를 들면서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파르모가 휴학할 예정이라는 건 소문으로 들었다 치더라도 그가 그녀를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파르모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수라는 말을 쏟아냈다. 사실 쏟아낸다고 할 만큼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본디 그는 말이 많지 않았다. 파르모가 알고 있는 전생의 그가 그랬듯이.
“나 때문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군.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고. 그러면 하지 마라. 다음 학기에 나 없다.”
“네?”
“나 없으니까 너 나오라고. 나 때문에 휴학하려던 거 아닌가?”
“그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파르모는 겨우 시선을 돌렸다. 빈말로도 거짓말을 못하는 건 딱히 상대가 아수라여서가 아니라 그녀의 성품 탓이었다. 볼일을 끝냈으니 아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췄다. 파르모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갑작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왜 제대로 된 대꾸조차 못 하는 걸까. 도대체 그 이유라는 게 무엇이기에.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즉흥적으로 꺼낸 질문이었다. 전조조차 느끼지 못한 파르모는 그대로 펄쩍 뛰었다. 이전까지 시선 맞추기 힘겨워하던 것을 잊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똑바로 아수라를 쳐다보았다. 계속 짓씹던 입술은 피가 몰려 붉었다. 무언가 말할 듯, 말하지 않을 듯 열렸다가 닫힌다. 아수라는 그만두었다.
“먼저 일어나지. 그 친구한텐 걱정 말라고 전해줘라.”
“왜?”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들었다. 일어난 그를 올려다보는 파르모를 마주 보다가, 아수라는 위화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멀었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왜…… 왜 휴학해요……?”
그런 걸 묻는 건 실례라고 지적하는 건 소용이 없을 듯했다. 무시하고 갈까 하다가 아수라는 생각을 고쳤다. 파르모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사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에 관한 소식이라면 귀를 닫아버리는 파르모는 몰랐지만, 아수라가 작년 한 해를 쉰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혼자이셔서.”
“……어머니?”
“그래.”
파르모는 평생을 믿어 왔던 걸 부정당하기라도 한 양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보며 아수라는 위화감이 조금 깨어진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깨어진다면 그것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한 발자국, 그녀를 향해 내딛은 그는 그 때문에 그녀의 중얼거림을 놓쳤다.
“뭐?”
파르모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아수라의 곁을 스쳐 달려 나갔다. 아수라는 그녀를 잡아 세울 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에 밀려나기라도 한 듯, 닿을 수 있었는데도 닿지 않았다. 묘한 충격에 아수라는 파르모가 사라져 간 정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내려다보았으나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꾹, 주먹을 쥐어보았다. 기묘하게도, 그는 상실감을 느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무의식중에 버스 정류장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 파르모는 허리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온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시야가 일렁이더니 이내 무릎이 젖었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 손을 타고 팔까지 적셨다.
달라.
방금 실감한 사실이 차갑게 그녀를 찔렀다. 냉혹하고, 잔인하고, 세상 모든 악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할 그였다. 파르모의 분노를, 증오를 온 몸으로 받아냈어야 할 그였다. 그런데 방금 마주한 그는 사과도 할 줄 알고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제 앞길마저 잠시 접어두는 사람이었다. 이제껏 굳게 지녔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
그가 아니면 어떡하지?
파르모는 제 몸을 부둥켜안고 떨었다. 온갖 것이 뒤섞인 머리로는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맞는데, 그 사람이 맞는데, 라고 끊임없이 되뇔 뿐. 추웠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떨면서도 파르모는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를, 잃어버릴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