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에린에서 오는 문], 스텝부스에서 판매되었던 레이스칼님(@mabi_skarl)님의 신간에 드린 축전입니다.
좋은 회지 감사드립니다 ㅠㅡㅠ!!
※스칼님의 원고 앞부분만 보고 쓴 축전입니다. 본문과 다른 내용이며, 이어지는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에린의 부엉이들은 정확하고 신속하다. 산길이나 뱃길과는 달리 굽이치는 일도 없고, 멀리 피해 돌아가야 할 절벽이나 소용돌이도 없으므로 그네들이 유독 조심해야 할 건 같은 높이를 지나가는 동료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역 중 마주치는 아는 얼굴에게 손 흔들어 인사하듯 부엉이들도 그들만의 신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탄광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어느 소년은 품어봤음직하다.
여하튼, 르웰린은 요즈음 들어 그들의 정확성, 그리고 신속성이 부쩍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부조리한 짜증에 또다시 짜증이 치미고 마는, 아주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산적인 스스로에게 환멸감까지 느꼈다. 다행히 그는 스스로를 아주 냉정한 눈으로 보는 법을 알았다. 그 요행을 실천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으레 그의 외양을 칭찬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곤 하는 아름다운 빛깔의 눈동자가 흰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그는 냉철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오류를 정정했다. 냉철한 성미로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길 게 아니라, 그 축복받은 성정으로도 접어지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된 걸 불행으로 여기는 게 맞다. 르웰린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눈을 떴다.
각오했던 대로 기분만 더 나빴다. 르웰린은 이제 막 부엉이가 제 머리에 던지고 간(불행으로 인해 심통 난 그의 심경을 반영한 표현) 편지를 따사로운 햇빛에 비춰보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겹쳐지고 뒤집혀, 읽을 수는 없으나 참 싱그럽게도 노오란 자연광에 그림자 지는 까만 자욱은 분명 글씨다.
그리고, 읽을 수 없는 것과 쓴 사람을 알아보는 건 다른 문제다. 르웰린은 이제 읽지 않고도 그 내용을 능히 잠작 할 수 있었다. 누가 썼는지, 누가 보냈는지 알았다. 모든 문장에 하나의 고유명사가 반복될 것이다. 밀레시안님, 밀레시안님께, 밀레시안님이. 절로 나오는 한숨을 가늘고 길게 뽑았다. 지체 높아야 할 단장님께서 애정 한 자락 숨기지 못하셔서야 비밀 단체의 면이 서겠습니까? 라고, 말하기는 또 싫었다. 왜냐하면……
르웰린은 그 접어지지 않는 마음을 아주 잘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두 문장 사이에는 성소와 언덕 사이의 절벽만큼 넓고 깊은 논리적 비약이 있었으나 무시했다. 어차피 설득해야 할 대상도, 설명해야 할 대상도 없다.
아니, 한 명은 있을지도 모른다. 르웰린은 떠올린 문장의 끝이 진흙처럼 뭉개진 모양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분명한 태도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보여야 한다는 건 처세술의 기본이지만,(물론, 대부분의 분야 기본이 그러하듯 이 또한 실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 경우는 처세술 따위와는 전혀, 조금도, 관련이 없었다. 전략적으로 설명을 생략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물론 설명하지 않고도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거니와 오히려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는 편이(지금 그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져 길로 늘어놓는다면 탈틴 구릉 스무 개쯤은 능히 넘기고도 남았듯) 일을 꼬아놓을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간단히 말해, 시작은 질투였다. 억울함도 약간은? 아주 조금은. 그의 본질은 신실한 성직자다. 때문에 르웰린은 그러한 감정의 추악함에 더 예민했다. 사교계의 중심에 서서 물밑에서 질척거리는 숱한 암투 중 많은 수가 저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 약간은 당연하기까지 한 일이며…… 그의 단장님이 밀레시안님을 아주 오랫동안 동경해왔다는 건, 알반 기사단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촌극의 상대로 밀레시안을 지목하길 피하지 않은 건 르웰린의 앙갚음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달리 말하면 단장님께는 전혀, 조금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르웰린은 오히려 이 무성한 소문이 눈 멀어 닫힌 그의 귀에도 가 닿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달려오지는 못할 테니 이번에야말로 르웰린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설명을 바라는 편지가 오지 않을까?
아니, 그는 언제나 어느 의미로든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생각만으로도 불길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르웰린은 한숨을 쉬며 편지를 펼쳤고…….